불만백천세우
불만백천세우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09.17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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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인생백세가 결코 허언이 아닌 시대가 도래했다. 불과 십년 전만 해도 고개를 갸우뚱하던 이들이 많았지만 지금 이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은 옛말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언감생심(焉敢生心)이지만 고소원(固所願)이었던 백세 시대를 맞았지만, 인생에 만족을 느끼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짧은 인생에 긴 것은 예술만이 아니다. 백세의 인생보다 열배나 긴 것이 있었으니 이름 하여 천년 시름(千歲憂)이다.



◈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15

生年不滿百(생년불만백) : 사람은 채 백년을 살지 못하면서

常懷千歲憂(상회천세우) : 늘 가슴에 천년의 시름을 품고 있다네

晝短苦夜長(주단고야장) : 낮은 짧고 정녕 밤은 길기만 하니

何不秉燭遊(하불병촉유) : 어찌 촛불을 밝혀 들고 노닐지 않으리오?

위樂當及時(위악당급시) : 즐길 일은 그때그때 즐겨줘야 되나니

何能待來자(하능대래자) : 어찌 내일을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愚者愛惜費(우자애석비) : 어리석게도 돈 쓰기를 아까워한다면

但위後世嗤(단위후세치) : 단지 후세의 비웃음거리만 될 뿐이라네

仙人王子喬(선인왕자교) : 신선이 된 왕자교를

難可與等期(난가여등기) : 기다려 만나기는 진실로 어렵도다



보통 시에서는 정(情)과 경(景)이 교융(交融)한다. 먼저 경(景)을 그리고 나중에 정(情)을 풀어낸다. 그러나 이 시에는 경(景)은 없고 정(情)만 있다. 그래서 자칫 무미건조하기 쉽지만, 동사(動詞)를 활용한 형상화(形象化), 거스르지 않는 허풍과 고정관념을 허무는 유쾌한 역설을 통해, 시인은 경(景)이 빠진 자리를 훌륭히 메우고도 남는 솜씨를 발휘한다. 만(滿)은 가득 찬다는 뜻으로 보통 항아리 같은 그릇에 물이 차는 것을 말한다. 만백(滿百)이란 백(百)까지 찬다는 말인데, 사람의 나이가 한살한살 쌓여가는 것을 물항아리에 물이 차 오르는 것에 빗댄 표현이다. 회(懷)는 가슴에 품는다는 뜻인데, 물건을 끌어안고 놓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주인공이 가슴에 품은 물건은 근심(憂)이다. 그것도 천년의 근심(千歲憂)이다. 애지중지하는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무언가를 품고 있는데, 그 무언가가 근심이었다니, 예상 못한 역설과 반전이 가미된 형상화 솜씨가 돋보인다. 시인은 인생이 짧음을 탄식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시인이 탄식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길이에 비해 턱없이 많은 근심을 품은 사람의 어리석음이다. 시인은 어리석음을 탄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근심하지 않고 사는 노하우를 설파하는 데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짧은 낮은 이왕 노닐고 있으니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잠 못 드는 긴긴 밤이다. 근심이라는 애물단지를 보물처럼 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비방(秘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둠을 밝힐 촛불을 켜 들고 노닐면 되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촛불힐링이다. 백에도 차지 않는 짧은 인생을 근심으로 지새울 수는 없다. 그러니 밤낮을 가리지 말고 노닐라는 것이다. 어두우면 촛불을 밝혀서라도 말이다. 노니는 것도 그냥 노니는 게 아니다. 나름의 철칙이 있다. 즐길 일은 절대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돈을 아낌없이 쓰는 것이 양대 철칙이다. 인생이 짧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근심은 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불로장생(不老立?)의 신선이 되고자 하는 것 또한 또 하나의 부질없는 근심에 불과하다.

주(周) 영왕(靈王)의 태자(太子) 신분을 버리고 숭산(崇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왕자교(王子喬)처럼 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근심 없이 살 수 있다면 짧은 인생도 살만하다. 더구나 근심 없는 인생백세라면 금상첨화(錦上添花)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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