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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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희진 <수필가>
  • 승인 2012.09.11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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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강희진 <수필가>

오늘 아침 출근하는데 비가 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입구에 모자를 눌러 쓰고 큰 가방을 멘 여자가 비를 보며 서 있었다.

누구네 집을 방문한 사람이려니 생각하면서 아파트 뒤편에 세워진 자동차를 향해 갔다. 차 문을 열고 우산을 접으려는데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전단지로 비를 가리며 다가왔다. 무슨 볼일인가 싶어 쳐다보니 비가 와서 그런다며 터미널까지 태워 달라고 했다.

잠깐 동안 수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걸어가는 게 안됐다고 지나가는 사람을 태워주다가 봉변을 당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그렇지만 비를 맞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몰라라 할 수 없어 거절하지 못하고 태웠다. 그리고 터미널까지 가는 5분여 동안 얼마나 무섭고 섬뜩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그 여자는 조카 집을 방문했고 조카가 출근하면서 도어 비밀번호를 알려줬는데 그만 잊어버려 들어가지를 못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남의 차를 빌려 타는 미안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으로 보였다.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였지만 횡설수설을 듣는 나로서는 과장된 표현으로 공포의 시간이었다. 처음에 거절했으면 간단한 일인 것을 굳이 태우고는 괜한 마음 걱정을 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남자도 아닌 여자를 앞에 두고 무서워 벌벌 떨었다는 게 어이없기도 했지만 연일 터지는 성폭력범에 여성운전자 납치 사건 등으로 사람을 경계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고 생각하니 씁쓰름한 기분이다. 어떤 여성정치가는 성폭력범에게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요즈음이다. 거기에 맞추어 자신을 지키기 위한 온갖 호신술과 대처법이 속속 등장하는 추세지만 비웃듯이 어제도 하교하던 여고생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딸만 둘을 키우다 보니 객지에 나가 있는 딸들에게 날마다 "조심하라"를 반복하고 전화를 받지 않으면 통화가 될 때까지 안절부절 못한다. 얼마 전 방학 때는 딸아이가 여행을 가겠다는 것을 말리느라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낯선 사람은 여자든 남자든 두려운 이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고서야 어찌 살 수 있는가. 산짐승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고 한 옛말이 실감이 날 정도다.

20여 년 전인 신혼 때가 생각난다. 차도 다니지 않는 공장 사택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는데 낮에 읍내라도 나갈라치면 버스가 다니는 곳까지 3킬로의 비포장도로를 걸어서 나갈 만치 외딴 곳이었다. 혼자서 걸어가다 보면 자가용이나 트럭 등이 섰고 버스 터미널까지 태워주는 게 일반적인 인심이었다. 지금 정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간이 부어도 한참을 부은 행동으로 생각되지만 그때는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후 나도 차를 사고 그 길을 걸어 다니는 마을 사람들이 종종 차를 세우면 버스 타는 곳까지 태워 주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아침 낯선 여자를 태우고 등에 땀이 나도록 겁을 먹었으니 참으로 유감스럽다. 아무런 사심 없이 서로 태워 주던 정서가 그립다. 목적지까지 갈 동안 서로의 근황을 묻고 안부를 전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남을 도와주는 인심이 통하지 않는다. 짐을 들고 쩔쩔매는 할머니에게 도와준다고 접근한 뒤 금품을 훔쳐 달아나는 사람도 부지기수라고 하니 무거운 짐을 들고 가면서도 누군가 들어주겠다고 하면 불안해서 거절해야 될 판이다. 호의를 베풀어도 받는 측에서는 달갑지 않게 여기는 세상으로 바뀐 셈이다. 이러니 사람이 가장 무서운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말끝마다 사람 조심하라고 이르는 것을 언제나 그만 두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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