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죽이기
귀뚜라미 죽이기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2.09.06 21: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귀뚜라미를 죽였다. 죽이고 나서 나의 경망스러움에 한참 동안 후회해야만 했다. 나는 그놈을 어떻게 대했어야 하나?

잠을 자다 소음에 깼다. 귀뚜라미 소리였다. 집안까지 들어온 놈 때문에 야밤에 잠을 깬 것이다. 머리맡에서 목청 높여 울어대는데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렇다고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살충제를 대강 뿌렸더니 소리가 나지 않아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날 마루에 앉아있는데 귀뚜라미 한 마리가 뛰어다니는 것 아닌가? 필시 그놈이었다. 잡히는 것이 신문이라서 냅다 내려쳤다. 그런데도 멀쩡해서 다시 한 번 내려쳤더니 오른발이 떨어져 나가고 움직이지 않았다. 떨어진 다리는 잘 잡히지 않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 따라올라 오게 해서 몸체와 함께 버렸다.

이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손가락에 남은 촉감과 더불어 잘 했는가 하는 생각이 몰려왔다. '날 잠 못 자게 한 놈이니까 죽어도 싸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일 필요까지 있었나 하는 후회가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귀뚜라미는 생각보다 빠르지 않아서 손으로 한 큼 모을 수도 있었다. 손으로 잡는다는 것이 꺼림직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못할 일은 아니다. 바퀴벌레라면 못 잡겠지만 그래도 귀뚜라미인데 잡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손으로 한 옴큼 쥐듯 잡아 풀밭으로 버리면 그만이었다. 나의 불쾌감이 놈의 생명을 빼어도 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었다. 놈의 노래가 아무리 날 잠 못 자게 했더라도 말이다. 놈의 우는 본능이나 나의 자려는 본능이나 똑같은 본능인데, 본능끼리의 상충된다고 꼭 살상으로 나갈 까닭은 없는 것이다. 귀뚜라미 정도의 속도라면 내가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공연한 살생이 이처럼 회한을 불러일으켰다.

나의 행동이 조건반사였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 맛있는 냄새가 나면 침이 나오듯, 조건에 대한 반사였을까? 그래, 모기가 물면 누구나 손바닥으로 때려잡는다. 그래, 누구나 파리를 잡고 개미를 잡는다. 방안에 들어온 귀뚜라미도 그것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잡자 잡어! 나를 위해 벌레를 잡자!

귀뚜라미에 대한 문화적 인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서구에서는 귀뚜라미를 나쁘게 생각한다. 독일 글에서 귀뚜라미 우는소리를 괴이하게 그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가을의 전령으로 좋게 본다. 문화적 간섭 때문에 죽이고 나서 이렇게 회한이 남는 것인가?

아니다. 내 행위의 생각 없음을 꾸짖는 것이다. 생각 없이 행동하는 나의 수양부족이 부끄러운 것이다. 조금만 생각했더라면 한 생명을 공연히 죽일 필요가 없었는데 하는 후회인 것이다. 글쎄, 고승이라면 모를까, 아파 오는 통증에 본능적으로 가는 손을 참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순간순간에 늘 연습하면 혹 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판단시간은 1~2초였지만, 수양하면 그 안에도 즉각적으로 결정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습기(習氣)가 문제 아닐까?

공자는 일흔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어긋나지 않았다'(從心所欲不踰矩)고 했다. 나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했더니 회한이 많다. 언제쯤이나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후회가 없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