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엽(梧葉) 하나 떨어지면
오엽(梧葉) 하나 떨어지면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09.0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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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세상 모든 일에는 나름의 전조(前兆)가 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봄의 알림이가 매화라면, 가을의 조짐은 아무래도 오동잎에 숨어있다. 매화가 후각적이라면, 오동잎은 청각적이다. 옛사람들은 떨어지는 오동 잎 소리로 가을이 옴을 알아챘던 것이다(梧葉一落盡知秋). 오월에 자주색을 피우는 것으로도, 어린 딸이 장성하여 혼수 장만으로 딸과 나이가 같은 그루터기를 자를 때도 보이지 않던 오동나무의 존재감은, 그 잎사귀 하나를 떨어뜨림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드러난다.

가을이 옴을 알리고자 자신의 몸통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온 잎사귀 하나는 세상에 가을이 왔다는 숙명적 소식을 전하고서야 장렬히 대지에 몸을 맡긴다. 주자(朱子)로 알려진 남송(南宋)의 대유(大儒)이자 문호(文豪)였던 쭈시(朱熹)의 시에 등장하는 오동잎은 해마다 때가 되면 나타나서 여전히 가을의 전조 노릇을 하고 있다.



우연히 이루어지다(偶成)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로학난성) : 젊은 나이는 늙기 쉽고 배움은 이루기 어려우니

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불가경) : 손가락 한마디 시간이라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네

未覺池塘春草夢(미각지당춘초몽) : 연못의 봄풀 꿈 아직 깨지도 않았는데

階前梧葉已秋聲(계전오엽이추성) : 섬돌 앞 오동잎은 이미 가을 소리로고



과연 유가(儒家)의 중시조(中始祖)답다. 처음 출발은 전형적인 유가(儒家)의 사고틀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형식상으로는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시 규칙을 채용하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근엄한 경서(經書)의 경구(警句)이다. '젊은 나이가 늙기 쉽다(少年易老)'는 것은 삶의 유한성(有限性)을 달리 말한 것인데, 여기서 주목할 글자는 이(易)이다. 정확하게는 젊은 나이는 늙기 쉬운(易老) 게 아니라, '반드시 늙는다(定老)'이다. 그런데 이것을 이로(易老)라고 느슨하게 쓴 까닭은 뒤에 따라 나오는 '배움은 이루기 어렵다(學難成)'와의 대비를 의식해서이다.

나이는 노력하지 않아도 먹게 돼 있지만, 배움은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루한 공자님 말씀이 갑자기 근사한 매력을 발산하게 된 것은 쉬움(易)과 어려움(難)이라는 글자의 대비적 운용의 결과이다. 일촌광음(一寸光陰)은 아주 짧은 시간을 나타내는 말로 굳어졌지만, 따지고 보면 대단히 문학적이다. 손가락만하지도 못하고, 손가락 세 마디 중 하나(一寸)라고 한 표현에는 문학적 재치가 잔뜩 묻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첫 련(聯)은 그다지 시적(詩的)이지 못하지만, 둘째 련(聯)에서의 극적 반전(反轉)을 위한 장치로서는 전혀 손색이 없다. 각성(覺醒)이라는 말이 있다. 꿈을 깨는 것이 각(覺)이요, 술을 깨는 것이 성(醒)이다. 각몽(覺夢)이요, 성주(醒酒)인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아직 꿈을 깨지 않았다(未覺夢). 그냥 꿈이 아니고, 마당 가운데 연못가에 갓 돋아 난 파릇한 봄 풀 꿈이다. 봄풀이 꿈에 나타난 것은 그것을 간절히 기다렸기 때문이다. 애타게 기다리던 봄이 비로소 온 것이고, 그래서 시인의 그날 밤 꿈에 봄풀이 보인 것이리라.

시인의 황홀한 꿈을 깨운 것은 뜻밖에도 새벽녘, 방문에 닿은 섬돌 앞, 오동나무에서 떨어진 잎사귀 하나가 내는 작은 소리였다. 여기서 시인이 말한 것은 물리적 시간의 양(糧)이 아니라, 감각적 시간에 대한 주관적 인식이다. 실제로는 봄과 여름, 여섯 달이 지나서야 가을이 오겠지만, 시인의 감각으로는 하룻밤 사이의 일로 인식된다. 세월의 빠름을 이렇게 섬세한 감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이 더 있을까? 공맹(孔孟)이라는 유학(儒學)의 원석(原石)을 장인(匠人)의 솜씨로 다듬어 성리학(性理學)이라는 명품으로 재탄생시킨 비결은 다름 아닌 그의 탁월한 감수성이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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