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속에서
태풍 속에서
  • 이제현 신부 <매괴여중·고 사목>
  • 승인 2012.09.0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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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이제현 신부 <매괴여중·고 사목>

험상궂은 태풍을 만나 슬픔을 겪고 있는 이웃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가만히 몸을 가누기 어려운 바람은 학교에도 작은 흔적을 남기고 떠났는데, 그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많은 분에게 주님께서 위로와 평화가 되어주시기를 청하며 기도합니다.

저는 비바람이 유난히 거셌던 이번 태풍을 통해,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은 때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여기며 기세등등했던 마음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연의 자유를 보여주는 태풍 앞에서 지상 최고의 가치로써 나 그리고 자유에만 매달려 살 수 없음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태풍은 우리의 한계를 들추는 썩 반갑지 않은 불청객과 같습니다.

하지만, 약한 가지를 솎아내며 지나간 태풍은 평범한 일상 안에서 희망의 표지를 찾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생활하는 학사 앞에는 오래되었지만 아담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그다지 우람하지는 않지만, 태풍 속에서도 잎사귀와 잔가지들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지만, 태풍을 통해 요즘 말로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태풍은 사람 안에 담긴 희망을 발견하게 해주었습니다. 갑작스런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분들을 도와주는 손길을 통해, 강바람에 떨어진 과일을 기꺼이 사려는 마음들을 통해 이웃과 연대하는 모습 속에서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노래한 시인의 말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태풍은 자연 안에서 묵은 것을 새것으로 갈아주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워낙 불 같은 성질로 다가오는 터라, 사람이나 자연이나 지레 겁먹고, 익숙하고 길들여진 것을 놓아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저기 떨어진 가지들을 통해 태풍은 완고한 마음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되려면 뿌리 깊은 나무처럼, 우리 생명의 원천에 삶의 기준을 두라고 호소합니다.

이제 자연의 태풍은 지나갔지만, 아직 우리는 여전히 태풍 한가운데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권리에 거의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자의 권리를 늘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하느님의 영역인 생명도 조작의 대상으로 삼으려 합니다.

얼마 전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려던 재분류 안이 전문의약품 유지로 결정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생명의 문화를 거스르는 재분류 안을 보고 미사와 기도를 통해 호소해왔고, 그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문화를 거스르는 태풍은 끊임없이 불어옵니다. 그 광풍에 비해 우리의 노력은 미약해 보이더라도, 생명의 신비를 지키려는 걸음은 참된 행복에 이르는 희망의 여정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태풍 속에서 의연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시기를 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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