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納┌) 과 처서(處暑)
다산(納┌) 과 처서(處暑)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08.27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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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處暑)가 지났다. 입추(立秋)가 지난 뒤의 더위를 남은 더위(殘暑)라 하고, 이마저도 사라지고 본격적으로 가을 날씨가 되는 것이 바로 처서를 전후한 때이다. 도무지 그칠 것 같지 않은 천하의 무더위도 흐르는 세월을 거역할 수는 없다. 처분(處分), 처리(處理), 처치(處置), 처결(處決)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처(處)라는 말에는 없앤다는 의미가 있어서, 처서(處暑)를 더위를 없애다 내지는 입추(立秋) 뒤의 잔서(殘暑)를 처분(處分)하다는 뜻으로 새기는 경우가 많지만, 기실 처서(處暑)의 처(處)는 처녀(處女) 또는 처사(處士)의 처(處)와 같은 쓰임으로 새기는 것이 한결 의미에 부합하다. 처녀(處女)는 자신이 태어난 집을 떠나지 않은 딸(女息), 곧 결혼하지 않은 딸(女息)을 일컫는 말이고, 처사(處士)는 아직 벼슬자리에 나가지 못한 채, 태어난 집을 떠나지 않고 있는 젊은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처서(處暑)의 처(處)는 없앤다는 의미보다는 제 역할을 하지 않은 채, 머물러 있다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름 석 달 동안 맹위를 떨치던 더위가 더 이상 활동하지 않고 얌전하게 가만히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처서(處暑)는 처녀(處女)나 처사(處士)처럼, 아직 제 역할을 찾지 못한 채, 그냥 집에 있는 더위라는 뜻이 된다. 가을의 초입을 여자가 시집가지 않거나, 젊은이가 벼슬하지 않은 것에 빗대어 처서(處暑)라 부른 것은 참으로 운치 있다. 이러한 처서(處暑)의 풍광을 다산(納┌) 정약용(丁若鏞)의 시를 통해 살필 수 있는 것은 여간한 행운이 아니다

 

수안으로 부임하는 길에서 짓다(赴遂安途中作)

異鄕天氣最難知(이향천기최난지) : 타향 날씨는 가장 알기 어려워서

處暑剛如白露時(처서강여백로시) : 이곳의 처서는 꼭 내 고향 백로와 같아라

曉出縣門行數里(효출현문행수리) : 새벽에 고을 문 나서 몇 리를 가노라니

紫花紅穗滿郊陂(자화홍수만교피) : 장다리 꽃 붉은 이삭이 성문 밖 강둑에 가득하네

野屋通身是瓠瓜(야옥통신시호과) : 들판의 집엔 온통 박이 주렁주렁 매달려

恰如枯被藤蘿(흡여고시피등라) : 마치 마른 감나무에 등나무가 덮인 것과 같네

一翁一當門坐(일옹일온당문좌) : 한 쌍의 노부부 문에 이르러 앉아 계시니

多少悲歡此裏過(다소비환차리과) : 얼마만큼의 슬픔과 기쁨이 여기를 지나갔을까



외직(外職)과 유배(流配)로 점철된 인생을 산 다산(納┌)에게 타향에서 맞은 처서는 남 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킨 듯하다. 황해도 수안(遂安) 땅은 아무래도 북쪽이라 같은 처서라도 서울보다는 기온이 낮았다. 그래서 보름 뒤에 오는 절기인 백로(白露)와 같다고 한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성문을 나서자 만난 풍광은 완연한 가을이다. 강둑에 가득한 장다리꽃의 붉은 이삭은 여름의 무더위를 정면으로 겪으며, 그것을 자양(滋養)삼은 결과물이다. 그리고 들판에서 만난 시골 농가가 온통 박으로 뒤덮여 있는 것에서 시인은 바짝 마른 감나무에 등나무가 가득 얽혀 있는 것 같은 생명력을 본다. 들판 농가의 주인은 한 쌍의 노부부인데, 이들 또한 인생의 절기가 가을이다. 가을에 휩싸인 집의 문 앞에 앉아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노부부에게서는 온갖 역경에도 굴하지 않은 강인한 지혜가 물씬 묻어난다. 무더위를 이겨낸 가을 풍광과 인생의 역정을 거쳐 인생의 가을인 노년에 접어든 노부부의 모습은 퍽이나 닮아 있다. 시인에게 처서의 풍광은 결코 허무하지 않다. 도리어 더위가 아가씨처럼 나긋해진 처서의 풍광과, 인생의 고비를 잘 넘긴 노년에서 굳건한 생명력을 발견하였으니, 과연 사화(士禍)와 유배(流配)의 역경을 뚫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다산(納┌)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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