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과 텃밭 사이에서
꽃밭과 텃밭 사이에서
  • 김종례 <보은 회남초 교감>
  • 승인 2012.08.21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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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종례 <보은 회남초 교감>

밤새 이슬 듬뿍 머금어 영롱해진 꽃들의 두런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는 요즘이다. 어쩌다 새벽 예배에 다녀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태양의 찬란함과 막힘없이 소통되는 들녘의 바람과 안개 속에서 청아하게 피어나는 들꽃들이 어우러진 싱그러운 여름 아침을 마중하기 위해서 논두렁 밭두렁을 걷는다.

얼마 전만 해도 벼 포기들이 연둣빛 살을 비벼대며 초딩 아이들처럼 앙증맞더니, 며칠 새 하늘을 향해 진록을 뿜어대며 청소년들의 기상처럼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태양이 온 대지에 작열하던 8월이 지나면, 서서히 누런빛으로 황금물결을 만들 가을들판이 벌써부터 눈앞에 선하다. 한 바퀴 돌아보곤 나무 평상에 우두커니 앉아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감나무 잎들 사이를 비집고 쏘아대는 햇살 한줌을 온 몸에 받는다. 그리고 우리 집 대문과 이어진 옆집 꽃밭으로 아침 문안을 간다.

근래에 귀농하여 시시때때로 가꿔 놓은 옆집 꽃밭에는 여름 꽃들이 다채롭다. 밤새 발아래 까만 씨알 몇 개 해산하느라 노곤해져 입을 앙다문 여시 같은 분꽃, 여인들의 낭만이 물든 주먹 봉선화도 탱탱하니 물오르고, 가느다란 몸매를 한들거리며 바람에 일렁이는 한련화의 우아함, 그 옛날 어머니 무명 적삼에 꽃수 놓였던 작약도 소박한 미소로 다소곳이 피었고, 산 이슬에 바짓가랑이 적시며 소꼴 베던 총각들이 꺾어 주던 산나리도 하산을 하였다. 울타리 너머로 이리저리 갸웃거리며 외로움을 달래는 토종 개국화까지 한 가족이 되어 저마다 개성미 넘치는 미소로 마음을 붙잡는 아침이다. 그

네들만의 귓속말이 어찌 저리도 정겨웁고 감미로운 것인지, 초가을이 지나도록 정녕 심심치가 않은 것이다. 뜨거운 폭염 아래서 볼이 달아올라 어느 꽃보다도 선명한 삼채원의 빛깔을 자랑하는 백일홍도 이 한여름 정열의 영혼을 선물한다. 그 옆에 서 있는 목 백일홍도 불꽃같은 생명의 약동을 몸과 마음에 흠뻑 전염시켜 주고 있다. 꽃밭을 가꾸어 본 사람은 생명의 섭리를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다투어 가며 떠들썩하니 꽃을 피우다가 이별의 왈츠를 추어대며 서서히 한 줌의 검불때기로 사라지는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다음에는 샛길을 돌아 우리 텃밭의 가족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는 일이다. 작년 가을에 따두었다가 미처 갈무리를 못해 썩어가는 호박을 울 너머로 훌쩍 내던졌더니, 그 자리에 무더기로 싹이 돋아서 넓은 잎들이 뭉글뭉글 뭉게구름마냥 나무위로 두엄위로 울타리 너머로 활개를 치며 뻗어가는 요즘이다.

한 구석에서는 오이와 수세미가 달리기 경주라도 하듯 새끼줄 따라서 지붕으로 기어오르는 모습은 마음의 감기조차 씻은 듯이 낫게 한다. 어쩌다 삶의 뒤안길이 울적하거나 아파오는 날에도 이것들과의 소통으로 인하여, 생명수 스미는 듯 마음의 활력소가 모락모락 용솟음쳐 오른다. 이리저리 고랑을 넘나들며 어제보다 한 뼘은 더 자라나 살랑대는 애들에게 눈웃음을 보내고, 며칠 사이에 푸른 고추가 붉게 물들어 가는 모습에서는 확신과 신념을 배운다. 그 옆자리에 간신히 비집고 앉은 상치와 쑥갓, 신선초, 케일들이 연한 빛을 내며 저녁상에 오를 만큼 쑥쑥 자라주는 게 신통방통하기 그지없다.

방울토마토도 양다리 양팔에 백개도 넘는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주인을 위해 힘겨운 듯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은 완전 감동이다. 텃밭의 파수꾼 노릇을 하는 옥수수 또한 날이 갈수록 통통히 여물어 저녁 평상 위에서의 만찬이 기다려지는 요즘이다. 서로 어깨를 가지런히 하며 웃자라지도 덜 자라지도 않으면서, 동고동락 Companion Vitamin을 퐁퐁퐁 날려주는 여름! 우리네 짧은 인생 스토리와 너무도 닮은 텃밭과 꽃밭 사이를 오가면서, 점점 원초적인 모습을 잃어가는 자아를 발견하는 아침이다.

어느덧 입추가 지나고 처서가 다가온다. 조석으로 부는 선들거리는 바람 앞에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절감 할 때가 멀지 않았음을 느끼며, 흙처럼 진솔하게, 벌처럼 성실하게, 꽃처럼 나비처럼 아름답고 자유롭게 춤추며 살다 가기를 소원하며 아침 단상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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