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이 상실된 사회 - 사람이 그립다 - 전문가 진단과 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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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기자
  • 승인 2012.08.13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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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가족주의 벗어나야"

박희 서원대 사회교육과 교수

동아시아의 변방에 묻혀있던 한국은 전쟁으로 분단의 고통을 겪었지만 압축적 경제성장을 통해 아시아 강국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우리는 위기의 징후도 감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세계 주요국들의 비교 문화적 가치 지도를 보면, 한국은 전통적 가치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합리주의의 가치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만 자기-표현적 가치보다는 생존적 가치에 더 근접해 있다.

즉, 자아실현을 통한 행복의 추구가 아니라 극한 경쟁 속에서의 살아남기가 삶의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한국의 이런 상황이 가족주의(Familism)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단한다. 가족주의는 가족애라는 보편적 현상을 넘어 자기 가족 중심의 이기주의를 드러내는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근대 초기에 이미 기당 현상윤 선생이나 고하 송진우 선생은 가족주의를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만 위하는 이기이가(利己利家)의 생활윤리라고 비판했다.

공동선이나 사회 공익성의 가치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고 자기 가족 성원의 세속적 성공만 바라보는 것이 가족주의적 이기주의의 병폐라는 점을 비판하면서 자기 성찰의 과제로 제시하고 있었다.

한국사회에서도 이런 가족주의적 태도가 자기와 가까울수록 친밀감을 더 크게 느끼게 한다는 '친친사상'(親親思想)과 결합돼 '집단내적 폐쇄주의'라는 병폐를 낳는다고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다.

자기가 속한 가족 성원의 세속적인 물질적 성공에 대한 과도한 열망은 공정한 게임의 규칙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과도한 교육열과 경쟁은 그 자체가 공교육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선행학습을 통해 자기 자식만이 차별화된 기회의 사다리를 탈 수 있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의식 속에서 공적인 경쟁은 의미가 없어지고 어떤 형태의 교육개혁도 무용지물이 된다.

희소한 형태로 주어지는 성공의 기회를 자기 자녀들이 선점할 수 있도록 자기를 희생하며 헌신하는 태도는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인정하듯 한국의 부모들이 세계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자기희생의 맹목적 사랑 속에서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의 전형을 보는 것이다.

생존주의와 비뚤어진 경쟁주의의 교묘한 결함으로 나타나는 가족주의적 이기주의는 평등주의를 양산한다.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무너진 상황에서 나와 나의 가족은 희생의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평등주의를 오히려 강화시키는 메카니즘으로 작용하게 된다.

필자는 우리 사회가 무한 경쟁과 사회적 공정성에 대한 회의감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이 상실되고, 가족 공동체의 진정한 연대가 파괴되어 가는 것을 더 우려하고 있다.

기러기 가족들이 끝내는 해체 상태로 마무리되고, 자녀의 성공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가정 폭력이나 청소년 자살 등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파멸을 초래하는 상황도 연출되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단면들이다.

세계 최고에 근접하는 이혼율과 자살율을 기록하게 해주고 있는 현대 한국사회의 위기, 그 뿌리는 결국 가족주의적 이기주의의 맹목성에 맞닿아 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를 떠올려야 한다. 한국인들의 삶의 행로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가족주의적 이기주의의 맹목성, 이것이 우리사회를 옥죄고 있는 이오니아의 시체이기 때문이다.

◈ "정의로운 소비 행복지수 높여"

김양식 충북학연구소 소장

지난 20세기 우리는 극단의 길을 걸어 왔다. 극단적인 전쟁과 폭력, 가난과 이념 갈등 속에서 일반 대중들은 존재하였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독재의 휘초리에 내몰린 대중들은 잘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고,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물신주의와 부도덕함에 적응해야만 하였다.

그것은 상류층일수록, 권력 소유층일수록 확대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극단의 역사레일을 걸으면서 확산되고 일반화되었다.

우리가 경험한 근대는 그런 것이었다. 전통을 버리고 서구 처럼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 오로지 그것을 위해 실력을 양성하고 출세를 하고 돈을 버는 것이었다.

서구의 이면에 있는 인문적 가치는 망각한 채 오로지 외형적인 부의 축적과 화려한 개인적 소비에만 내몰리었다.

그 결과 나라는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수 있었지만, 그 안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전통적인 공동체는 아무런 대안없이 해체되고 물신주의에 사로잡힌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10점 만점에 4.2점으로 OECD 34개국 중 32위로 꼴찌 수준이며, 세계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행복지수는 '안정된 삶'과 '소득 분배의 공평성'이 핵심요소라고 한다. 후자는 정의로운 소득 기회와 그런 기회를 통해 얻은 소득이 공평하고 조화롭게 분배될 때 가능한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소득의 출발점부터 다르며, 소득의 방식이 정의롭지 않는 면이 너무 많다. 또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축적한 부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호의호식하는데 소비한다.

그러나 자신만을 위한 소비의 끝은 행복이 아니다. 정의롭지 않은 소비이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소비란 배려와 조화, 그리고 균형감각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소비만이 상대적 빈곤감을 줄일 수 있고 함께 더불어 나눔으로써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돈에 대한 철학의 문제이다. 돈에 대한 우리 사회 일반의 생각은 끝없는 개인 욕망의 도구일 뿐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벌어야 하는 돈, 나와 나의 가족만을 위한 돈, 그런 돈은 끊임없는 개인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보상심리로 단순 소비 욕구만을 자극할 뿐이다.

그런 소비 끝은 잠시 웃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빈익빈 부익부는 심화되고 부자이든 가난하든 모두 행복지수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돈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 행복의 수단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20세기 역사가 물려준 '잘 살아 보세' 트라우마에 걸려 돈이 삶의 목적이 되어 불행의 늪에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제는 돈을 버는 데만 초점이 맞추어진 집단의식을 버리고 어떻게 돈을 멋있게 쓸 것인가 하는 돈 철학을 재정립할 때이다.

돈이 행복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소득도 중요하지만, 정의로운 소비가 더 중요하다.

정의로운 소비는 조화와 균형을 동반한다. 조화를 이룬 소비란 나와 너, 나와 지역사회가 함께 가는 소비를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소비방식이 기부이다. 그런 소비가 이루어질 때 사회의 균형점을 찾고 행복지수는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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