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기자
  • 승인 2006.07.19 09: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작은 생명
오미경 동화작가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뒤엔 조그만 산이 하나 있다. 아침과 저녁,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은 점점 늘고 있다. 봄이면 아카시아 꽃이 피고, 여름이 올 무렵이면 제법 무성해진 숲에 뻐꾸기가 찾아들고, 가을엔 단풍이, 그리고 겨울엔 앙상한 가지에 눈이 하얗게 덮인다. 이른 아침엔 나뭇가지 사이에 하얀 거미줄이 레이스 커튼처럼 드리워져 숲 전체가 비밀스런 침실을 연상케 하고, 저녁이면 둥지를 찾는 새들의 움직임으로 숲이 부산해진다.

운동 삼아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산이 높지 않아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몇 바퀴씩 돈다. 나도 거의 매일, 아침이나 저녁에 산을 찾는다. 산꼭대기엔 정자가 있고, 간단한 운동 기구가 몇 개 설치되어 있다.

예닐곱 바퀴 산을 돈 다음, 맨손 체조를 하고 훌라후프를 돌리면 한 시간 남짓 걸린다. 그렇게 땀을 빼고 내려올 때의 상쾌함이란! 더구나 글을 쓰는 내게 그 산은 작품 구상의 장소이기도 하다.

사람은 걸을 때 생각이 가장 왕성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집안에서는 생각이 꽉 막혀 풀리지 않다가도 산을 걷다 보면 술술 풀릴 때가 많다.

산은 내게 운동과 작품 구상, 게다가 머리까지 맑게 해주니 일석삼조인 셈이다. 그 산이 얼마나 고마운지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거의 날마다 산엘 오르니 이젠 낯익은 얼굴들도 꽤 있다. 그 중엔 한 곳에 가만히 앉아 아주 오래도록 땅바닥을 바라보며, 가끔은 혼자 뭐라 중얼거리는 할아버지도 있다. 유심히 지켜보니 그 할아버지는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개미들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치매기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며칠 전, 비가 오려는지 날씨가 유난히 후텁지근한 날이었다. 산길 위엔 줄지어 가고 있는 개미 행렬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다. 비올 것을 감지한 개미들이 뭔가 대비책을 세우는 모양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산을 몇 바퀴 돈 다음에 운동기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누군가 바닥에 길게 한 줄로 선을 그어 놓은 게 보였다. 처음엔 무심코 보았는데, 가만 보니 그 줄 바로 옆으로 개미가 줄지어 기어가고 있었다.

문득 그 할아버지가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훌라후프를 돌리고 있는데 그 할아버지가 아닌 다른 할아버지가 땀을 뻘뻘 흘리며 길다란 비닐 끈을 한 아름 안고 올라왔다. 공사장에 접근을 금지시키기 위해 쳐 놓는 그런 끈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개미가 지나고 있는 그 위로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끈을 길게 펼쳐 놓았다. 솔직히 처음엔 그 할아버지의 행동이 좀 이상해 보였다. 그런데 끈을 선에 맞추어 치기 위해 신중한 모습으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나는 그 할아버지가 하려는 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직접 듣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할아버지, 그 줄 왜 치시는 거예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아, 이 개미들 안 보여 사람들이 밟으면 죽을 거 아녀." 그 당연한 것을 모르냐는 투로 한 마디 던지고는 여전히 그 일에 몰두했다. 아! 그 때 가슴에서 일던 신선한 충격! 우리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개미에게 보이는 할아버지의 눈물겨운 배려는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러면 땅 위에 금을 그어 놓은 것도 이 할아버지였을까. 아니면 앞서 얘기한 그 할아버지가 사람들에게 조심하라고 금을 그어 놓았는데, 그 것으론 모자라다싶어 이 할아버지가 더 안전한 대비책을 생각해낸 것일까.

구슬땀을 흘리며 개미를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그 할아버지는 내게 무언의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지구의 주인이 인간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냐고. 나이 드신 분들은 이렇게 작은 생명 하나도 소중히 여기고 보살피는데…,

요즘 세상은 어떤가. 몇 푼의 돈에, 순간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사람의 생명조차 얼마나 가벼이 여기는가

여러 생명들이 조화를 이루며 꿈틀거리는 자연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 생명 경시를 불러오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것이 아닐까 이젠 여름 방학이다. 아이들과 함께 가끔 산을 오르는 건 어떨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