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검객
햇살검객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2.07.25 2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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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세상

박 승 류

햇살은 가끔 날이 설 때가 있다
날을 세워 다가올 때가 있다
칼날처럼 날이 선 햇살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리고 어쩌다, 깊숙이 베일 때가 있다
칼날은 계절마다 다른 검법으로 다가온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폭염검법에
차갑게 부서지는 혹한 검법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춘추검법까지도
모두 경험을 해 봤다
칼날에는 칼잡이의 혼이 들어 있어, 어떨 때는
한번 휘두른 칼날에 가슴을 철렁 베일 때가 있다
또 어떨 때는 마음이 동강날 때도 있다
모르는 사이 눈동자를 쓱싹 베일 때도 있다
우멍한 눈을 파고드는 우수(憂愁)검법은
춘추검법의 한 지류이지만
오랜 기간 숙련되어 으뜸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나는 우수검법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불혹을 지나 지천명으로 가는 길에
아차, 또 만나고 만 햇살검객
피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오늘도 나는
눈이 베였다
말간 피로 눈동자를 씻었다
배후는 늘 허공이었다



※여름 한 복판. 수은주가 고공 행진하고, 열대야가 밤까지 뜨겁게 달군다. 시인의 말처럼 햇살도 여름 칼날을 세운 게 분명하다. 빤히 알면서도 당할 수 밖에 없듯, 피부를 깊숙히 찌르는 햇살자락은 날렵한 검객이다. 가닥 가닥 풀린 햇살, 수억 광년을 건너오면서도 이 보다 더 날렵할 수 있을까. 허공만 눈부시게 짱짱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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