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출문(不出門)의 여름나기
불출문(不出門)의 여름나기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07.2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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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물리학적으로 세월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흘러가지만, 사람의 느낌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사람의 기분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세월은 더디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다. 계절에 따라서도 세월의 속도는 다르게 느껴지는데, 대개는 봄, 가을은 빠르고 여름, 겨울은 느리게 느껴질 것이다. 유독 더위에 약한 사람이라면 여름이 더디 갈 것이고, 빨리 여름이 지나기를 학수고대할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아무리 지루하더라도 여름날도 지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아까운 시간이다. 무더위가 싫다 해도 세월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시간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낀다면, 무더운 여름이라도 소홀함 없이 즐겨야 한다. 탕(唐)의 시인 바이쥐이(白居易)는 나름의 여름나기 지혜를 남겨 놓고 있다.

◈ 여름날(夏日)

東창만無熱(동창만무열) : 동쪽 창문은 날 저물어 더위 사라졌고

北戶량有風(북호량유풍) : 북쪽 문에는 바람 일어 서늘하네

盡日坐複臥(진일좌부와) : 종일토록 앉았다 누웠다 하며

不離一室中(불리일실중) : 방 안을 떠나지 않았노라

中心本無繫(중심본무계) : 마음에 본디 얽매임이 없으니

亦與出門同(역여출문동) : 이 또한 문 밖에 나가는 것과 다름없어라

전혀 요란하지 않다. 해변이나 계곡을 찾아 더위를 피하지도 않고, 부채를 부치거나 찬 음식을 먹지도 않는다. 그저 방 안에서 앉았다 누웠다 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면서도 여름을 힘들어 하기는커녕 즐기기까지 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계(無繫), 즉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시인은 방 안이 덥지 않은 단서를 찾아냈으니, 저녁 되면 더위 사라지고 열린 문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는 것이 그것이다. 한 낮에 뜨겁다는 말 대신 저녁 되니 시원하다고 말하고, 바람 한 점 없어 덥다고 하지 않고 어쩌다 부는 바람에 시원하다고 한다. 시인으로 하여금 더위를 모르도록 하는 것은 결국 긍정의 힘이다. 이 긍정의 힘의 원천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無繫) 시인의 마음이다. 시인은 마음이 무계(無繫)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온 종일 방 안에 있으면서도 문 밖으로 나와 시원한 곳을 찾아간 것과 똑같이 덥지 않다.

보통 기온이 섭씨 30도가 넘으면 무더운 날씨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날씨의 분류일 뿐이다. 더위를 이기려고 애쓸수록 더위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더위를 이기려 하지 말고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피서(避暑)다 해수욕(海水浴)이다 해서 요란을 떨 일이 아니다. 온 종일 방에서 뒹굴뒹굴하는 것만으로도 여름나기는 충분하다. 다만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가 되어 있는 사람에 한해서 말이다. 이 시를 읽고, 방에만 콕 박혀 있다 해서 우스개 소리로 하는 방콕이라는 말을 떠올린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방콕과 불출문(不出門)은 표면상으로는 같지만, 이면의 어감(語感)은 완전히 다르다. 궁상(窮狀)맞다는 부정적 이미지의 방콕 대신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조그만 불편을 아랑곳하지 않는 긍정의 불출문(不出門)으로 여름나기를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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