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발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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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기자
  • 승인 2006.07.1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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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의 전화
충북대사대부중 교사 원수라

갑자기 찾아온 더위로 인해 한없이 늘어진 오후, 그 오후의 나른함을 달래려고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음악을 듣고 있을 때, 핸드폰의 낯선 전화번호가 나를 흔들었다.

너무나 반가운 목소리!

3년 전, 우리 반 아이였던 은주였다. 늘 명랑하던 은주의 모습과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 함께 떠올랐다. 선생님이 너무 보고 싶어 전화했단다.

몇 해 전, 성안길에 있는 어느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은주를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정 형편 때문에 휴학을 하고 분식집에서 일하며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은주의 엄마는 현대 의학으로도 잘 고쳐지지 않는 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은주는 병원비 마련 때문에 중학교 시절에도 아이들 돌보기와 같은 아르바이트를 했고, 병원 진료로 몇 달씩 집을 비우는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과 동생들을 돌보면서 학교생활을 해 나갔다. 엄마와 학생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함께 하다보니 늘 은주는 수업 시간에 졸거나 멍하니 앉아 있기가 일쑤였다.

그런 은주의 모습은 처음에 나를 매우 화나게 했지만, 은주의 어려운 가정생활을 알고 나서는 측은함으로 다가왔다. 약간의 힘든 일만 있어도 포기하거나 성적이 떨어졌다고 자신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요즘 아이들에 비해 은주는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은주의 강한 생활력은 나의 수업 시간에 다른 아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종종 소개되었다. 그런 자신을 인정해 준 나를 은주는 눈빛으로 늘 따르곤 했다.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분식집에서 나를 만났을 때에도, "선생님! 저요, 낮에는 분식집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미용 학원에 다니면서 기술도 익혀요. 제가 나중에 미용사가 되면 선생님의 머리를 해 드릴게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현재 처지에 대해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제자들은 때가 되면 내 품을 떠나게 마련이지만 늘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몇몇 녀석들이 있다. 은주도 내 마음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제자 중의 한 명인데, 이렇게 전화를 주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통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은주는 "내수중학교의 느티나무가 제 빛을 발했어요"하면서, 그 소식을 전하고 싶어 전화를 했단다.

짜식, 내가 느티나무를 좋아했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그래, 이맘때면 물이 오른 느티나무들이 운동장을 가득히 메웠고, 조회대 옆의 큰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그 푸르름을 가장 뽐냈지.

초여름에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에메랄드가 촘촘히 박혀 있는 듯한 모습을 지니다가 한 번씩 비가 내릴 때마다 급속도로 싱그러움을 더해 가는 느티나무에 대해 종종 수업 시간에 얘기하곤 했지. 그리고 그 느티나무의 푸르름을 간직한 채 살자고 애써 설명했지.

그럴 때면 별 반응 없이 시큰둥해 하더니 이렇게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그 느낌을 전해 오다니, 흘려버린 4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얻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느티나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은주의 모습이 느티나무의 푸르름과 겹쳐 살아났다.

세상에는 시간이 흐르면 금방 잊혀지는 것들이 많다. 애써 기억하려 해도 생각나지 않는 것들이 많다. 그렇지만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에 깊이 담아두었던 사람이나 물건은 눈에서 사라져도 머릿속에 생생한 기억으로 똬리를 틀고 오랫동안 남아 있는 법이다. 그래서 마음으로 기억하는 시간이 더 긴 것이다.

4년이라는 세월을 떨어져 지냈으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걸 기억해 주고 그 기억을 전해주는 제자가 있어 너무도 행복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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