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단비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2.07.09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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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아파트 뒤 산비탈에는 작은 채마밭들이 올망졸망하다.

이른 아침이면 채마밭 사이 길을 따라 산에 오르는데 나날이 달라지는 푸성귀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소소하다.

애기 손톱 만하던 여린 상추 싹이 며칠 새 손바닥 만해지고, 콩잎마다 송송 잔털이 자란다. 꽃 진 자리 짙은 보랏빛 가지가 햇살에 반짝 윤기가 도는 모습을 지켜볼 양이면 내 밭인 듯 흐뭇하다.

낮고 좁은 둑을 따라 구불구불 경계 지어진 텃밭 풍경은 바라볼수록 정겹다.

한 가지 채소를 줄 맞춰 심어 깔끔하게 정돈 된 밭이 있는가하면 온갖 푸성귀들이 뒤섞여 자라는 밭도 있다.

종종 밭 모양새를 보며 주인의 성품을 짐작해 보기도 한다.

오랜 봄 가뭄은 비탈 밭에도 혹독한 시련을 가져왔다.

뜨거운 뙤약볕에 잎 끝이 타들어가고 병충해가 심해지며 천천히 초라해져갔다.

가끔 주인이 다녀갔는지 동그마니 젖어있던 물그림자도 잠깐 뿐 작은 바람에도 마른 먼지들이 푸슬푸슬 피어올랐다. 산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시원한 물을 한 잔 마시려면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목마름에 지쳐가던 유월의 끝. 비탈 밭에는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겨우 한 뼘 남짓 자란 참깨들이 하나 둘 꽃을 피우고, 상추와 쑥갓들도 씨앗을 맺기 시작했다.

나뭇잎 사이 보일 듯 말듯 숨어 지내던 복숭아는 알이 굵어지기도 전에 발그레 홍조가 들었다.

속 타는 사람들과 달리 60년 만에 오는 가뭄에도 침착하게 위기를 극복하고 나름대로 생을 정리하는 모습이 경건했다.

목마르게 하던 뜨거운 바람도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애쓰는 생명들의 열기로 다가왔다.

문득 부끄러워졌다.

한 해를 살다가는 생물도 위기를 감지하고 삶을 갈무리하기 위해 치열한 시간을 살아내는데 수십 년을 사는 나는 조금만 힘들면 쉽게 그늘 속으로 숨어들어 안주하고 싶어 한다. 정리해야 할 것들을 놓쳐버리고 위기에 허둥거린다.

그 비탈 밭에 단비가 내렸다. 부드럽고 촉촉한 안개가 살풋 낀 풍경 속으로 고구마 꽃이 예쁘게 피었다. 쑥갓꽃 노란 얼굴도 해맑다.

영글어 가는 씨앗 깊은 곳엔 인내한 시간들이 달큰하게 고여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7월이다.달력을 뜯어낸 자리에는 미련처럼 6월의 자투리가 남아 있다.

올해 계획했던 일들이 무엇일까 새삼 다시 수첩을 뒤적여 본다.

게으름에 밀려 수첩 한 귀퉁이 적혀있는 이루고 싶은 소망 한 줄은 꿈처럼 멀기만 하다.

7월 첫날에 다시 꿈을 적는다. 비탈 채마밭에서 만난 생명의 숨결이 느슨해진 가슴으로 단비처럼 스며들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 열망을 품게 한다.

풀들이, 나무들이 열매를 맺어 가는 것처럼 남은 반년의 삶이 내게도 성과 있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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