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에는 목적이 없다
진화에는 목적이 없다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2.06.29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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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얼마 전에 학술회의 하나를 주최했다. 제목이 '진화론은 목적론이 아니다-사회생물학 비판'이었다. 쉽게 말해 우리 사회에 유행처럼 통용하고 있는 생물학 위주의 사고가 지닌 위험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윌슨의 '통섭지식의 대통합',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어야 지식인 행사를 한다. 우리는 생물이라서 생물학으로 지식이 통합돼야 한다는 주장에 특별한 반발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유전자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생물학계 내에서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 생물학계 내에서도 아니, 윌슨과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있는 학자조차도 그의 생각에 적대적이다. 굴드와 르원틴 같은 생물학자들이 그렇다. 어째서 이렇게 다른가?

그것은 한마디로 진화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다. 여기서 묻자. 진화에는 목적이 있는가?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정말 많은 학생들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다만, 생물학전공의 고학년들은 배운 바가 있어서 아니라는 답변이 부쩍 늘어난다.

기린 이야기를 들어보자. 기린이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따먹기 위해 목이 길어졌는가? 텔레비전 교양 프로그램인 '동물의 왕국'에서는 그렇게 설명을 한다. 그러나 그런 설명방식은 '해가 떴다'는 표현과 같이 관습적인 표현일 뿐이다. 우리가 '해를 향해 돌고 있다'고 말하지 않듯이, '목긴 놈이 살아남았다'는 말보다 '목이 길어졌다'는 말이 편할 뿐이다. 기린의 목이 길어진 것은 살아남은 목이 긴 놈끼리 짝짓기를 해서 길어진 것이지, 목을 많이 쓰다 보니 길어진 것이 아니다.

맘모스의 예를 들어보자. 털이 있는 코끼리와 털이 없는 코끼리가 있었다. 그런데 빙하기가 와서 털 없는 코끼리는 얼어죽고, 털 있는 코끼리가 살아남았다. 그것이 맘모스다. 자연이 선택한 것이지, 코끼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목이 길어졌다고 해서, 털이 났다고 해서 결과가 원인을 규정해서는 안된다. 선택의 주체는 종이 아닌 자연이기 때문이다. 쓰면 쓸수록 발달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라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을 용불용설로 받아들인다. 경험이나 기술인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현대생물학은 용불용설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지만 문제는 여전히 목적론에 있다. 다윈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바로 라마르크의 목적론이었다.

진화에 발전이나 진보의 관념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것이 과학의 논리이다. 그러나 거기에 약육강식의 관점이 들어가는 순간, 진화는 제국주의의 논리로 바뀌어버린다. '나는 힘이 세, 따라서, 너를 잡아먹을 거야. 자연이 그렇듯, 인간도 그럴 수 있어'

진화가 복잡성이 아닌 다양성의 증가라고 믿는 고생물학자 굴드는 비평가 상을 받는 등 쉽고도 재밌는 생물학 책으로 유명세를 탔지만, 우리 나라에서만큼은 유독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가 지나친 경쟁사회라서 그런가 그리고 '잘난 놈이 살아남았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잘난 놈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살아남은 놈이 잘난 것도 아니다. 자연의 선택으로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을 뿐이다. 우열을 나누고 서열을 나누는 정신(rankism)은 생물계 어디에도 없다. 인간만이 생물학을 원용해서 자신의 지배와 통제를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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