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외상과 고희(古稀)
술 외상과 고희(古稀)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06.11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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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사람에게 실의(失意)는 하나의 숙명이다. 실의(失意)의 원인은 각양각색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실의(失意)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현명한 사람은 실의(失意)를 만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평생을 지독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당(唐)의 시인 뚜푸(杜甫)야 말로 실의(失意)의 달인이라는 호칭을 받을 만한 인물이다.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나 번번이 과거(科擧) 시험에 낙방하다가, 요행으로 얻은 관직에서도 금방 쫓겨나기 일쑤였다. 거느린 식솔들이 굶고 병들어 죽어나가는 것을 수차 보아야 했고, 본인 스스로도 병마와 싸워야 했다. 뚜푸(杜甫)의 인생은 실의(失意)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즐길 줄 아는 것 하나로 그의 인생을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향기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그의 시 취지앙(曲江) 두수 중 둘째 수이다.

 朝回日日典春衣(조회일일전춘의) : 궁궐 일 마치고 돌아오는 나날 봄옷 전당잡혀
 每日江頭盡醉歸(매일강두진취귀) : 날마다 연못가에서 흠뻑 취해 돌아가네
 酒債尋常行處有(주채심상행처유) : 술 외상은 기본으로 가는 곳마다 있는 것은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 : 사람이 칠십 사는 일이 옛부터 드물어서라네
 穿花협蝶深深見(천화협접심심견) : 꽃 사이를 뚫고 들어간 호랑나비 보일 듯 말 듯하고
 點水청정款款飛(점수청정관관비) : 물을 찍으며 나는 잠자리 느릿느릿 날아다니네
 傳語風光共流轉(전어풍광공류전) : 풍광들에 말 전하노니, 모두 함께 떠도는 신세이니
 暫時相賞莫相違(잠시상상막상위) : 짧은 세상 즐기면서 엇나가지 말게나

흔히 뚜푸(杜甫)를 현실주의 시인이라고 하지만, 그의 시가 무겁고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실의(失意)를 아파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는 많은 노하우를 집적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실의(失意)를 즐기는 것이었다.

어렵사리 얻은 벼슬자리였지만 얼마나 변변치 않았으면 입던 옷가지를 전당 잡힐까

그러나 그것이 처량하지 않은 이유는 밥을 못 먹어서가 아니라 술값 충당하려고 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술 외상이 깔려 있었지만, 이는 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인생이 짧기 때문이다.

시인은 짧은 인생을 즐기기 위한 방편으로 술 마시기에 나선다. 옷까지 전당포에 잡혀 술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 염체불구하고 외상 술을 마다 않는 뚜푸(杜甫)의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의 실의(失意)는 절망스럽거나 슬프지 않다. 도리어 인생은 즐겨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시인은 본인의 실의(失意)를 즐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간다. 꽃 사이를 나는 나비며, 물을 차고 나는 잠자리에게도 점잖게 타이르기까지 한다. 너희들도 모두 떠도는 신세들로 잠깐 존재하는 것이니 즐기면서 엇나가지 않아야 한다고. 이러한 시인의 모습은 능청스러우면서도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나이 칠십을 고희(古稀)라고 하는 연유가 이 시에서 말미암았음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 말이 술 외상과 상관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도 실의(失意)의 달인 뚜푸(杜甫)가 옷 잡혀서 술 마시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가는 곳 마다 술 외상을 하면서 둘러 댄 말이라는 것을. 인생백세 시대에 접어든 지금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는 인생백세고래희(人生百歲古來希)로 정정되어야 하지만, 여전히 실의(失意)는 많고, 인생은 짧기만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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