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엔 꽃보다 이것
초여름엔 꽃보다 이것
  •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05.22 01: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 태 봉 교수
입하(立夏), 소만(小滿) 지났으니 이제는 영락없이 여름이다. 밭에서는 보리 이삭이 피어나고, 산에서는 뻐꾸기가 울어댄다. 그러나 현실은 고달팠다. 김매기와 모내기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작년 식량은 바닥이 났고, 보리는 아직 익지 않아 먹을 것이 없던 보릿고개도 바로 이즈음이었다. 가장 바쁜 철이자 가장 배고픈 시기에도 사람을 위안한 것은 철마다 제철의 모습을 뽐내는 자연이었다.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승화시라 옛 부터 일러 있고'

널리 알려진 단가(短歌) 사철가의 일부이다. 봄이 꽃이라면 여름은 녹음방초라고 조상들은 읊었던 것이다.

北宋의 정치인이자 문인이었던 왕안쓰(王安石)는 그의 시 '초여름 정경(初夏卽事)'에서 초여름을 이렇게 그렸다.

石梁茅屋有彎기(석량모옥유만기) 징검다리 초가집에 굽은 강기슭 또 있고

流水賤賤度兩陂(유수천천도양피) 강물은 급하게 방죽 두 곳을 지나쳐 흐른다

晴日暖風生麥氣(청일난풍생맥기) 갠 날씨, 따뜻한 바람에 보리 냄새 상큼하게 묻어나는데

綠陰幽草勝花時(녹음유초승화시) 짙은 그늘, 우거진 풀이 꽃보다 좋은 철이로다

커다란 돌멩이를 듬성듬성 놓아두어 개울을 건널 수 있게 한 징검다리, 띠 풀로 이엉을 엮어 올린 초가집, 완만하게 굽어 돌아나가는 강기슭은 흔한 시골 풍경이지만, 평소에는 잘 눈에 띄지 않지 않다가 초여름에 접어들자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낸다. 물이 말라 붙어 있어 소용이 없던 징검다리가 초여름이 되어 물이 불어나자 눈에 확 띄인다. 이 징검다리를 건너야 만날 수 있는 작은 초가집도 덩달아 시인의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다른 때 같으면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던 강기슭의 굽어진 모습마저도 초여름 풍경에 생기를 더한다. 그렇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마법의 주인공은 바로 초여름이요, 이를 놓치지 않은 것은 시인의 예리한 감수성이다.

물은 어떠한가 겨우내 바닥이 말라있던 물은 이제는 흐를 수 있는 유수(流水)가 된데다 유속(流速)도 부쩍 빨라져서 방죽골 두 곳을 단숨에 지나쳐버릴 정도다. 초여름의 생기가 흐르는 물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변화이다. 부쩍 맑아진 날씨, 따뜻함이 물씬해진 바람은 그 자체가 변화의 객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변화를 유발하는 주체이다. 그들은 합심하여 보리 냄새를 탄생시켰다. 상큼한 보리 냄새야말로 시인이 발견한 초여름의 성찬이다

끝으로 시인은 봄을 의식하여 초여름 띄우기에 나선다. 누구나 봄을 계절의 왕으로 생각하는데 봄에는 꽃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이미 꽃이 지고 없는 초여름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꽃보다 나은 게 있다면 초여름이 봄보다 나은 철일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이 찾아낸 것이 바로 짙은 그늘(綠陰)과 우거진 풀(幽草)이다.

시인은 초여름 들판에 서서 봄 예찬론자들에게 일갈한다. 꽃보다 녹음유초(綠陰幽草)라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