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손병희 선생 90주기에 즈음하여
의암 손병희 선생 90주기에 즈음하여
  • 남궁진 <청주보훈지청 교육담당>
  • 승인 2012.05.16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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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남궁진 <청주보훈지청 교육담당>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이는 일제의 잔혹한 무단 통치에 항거해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언한 기미독립선언서의 첫머리다. 선언서 끝에 나열된 민족대표 33인 중 대표가 바로 우리 고장 출신 독립운동가 의암 손병희 선생이다.

선생은 1861년 청원군에서 태어나 22세에 동학에 입교, 1894년 동학혁명 때 북접의 통령으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동학군을 이끌었다. 이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세 교주가 돼 교세확장 운동을 벌였다. 또 훗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게 되는 출판사 보성사를 창립했고, 보성학교(현 고려대)와 동덕학교(현 동덕여대)를 비롯한 수십여개의 학교를 인수하거나 신설해 교육사업에도 크게 공헌했다.

1919년 선생은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평소 뜻을 같이하던 동지를 모아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해 국민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또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독립을 위한 제반 활동을 계획했다.

이를 바탕으로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규합이 진행돼 민족대표 33인이 구성되고,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견서 등의 초안이 작성됐다.

만세삼창을 한 후 선생은 자진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요양하던 중 조국의 독립을 1922년 5월 19일 6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선생의 일생에서 알 수 있듯 오롯이 민족을 위한 삶을 살았던 선생은 위인이자 의인이며,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에서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와 함께 대통령으로 선생을 추대했을 정도로 명망 높은 민족지도자였다.

정부도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자 1962년 김구, 윤봉길 등과 함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이러한 선생이 우리 고장 출신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자랑이다.

현재 선생이 태어난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는 의암 손병희 유허지가 조성돼 있다.

이곳은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널리 기리고자 생가지를 성역화한 곳으로 유허비와 영당, 동상, 의암기념관 등이 있다. 기념관에는 선생이 생전에 사용하던 유품과 훈장 등 100여 점의 유물을 만날 수 있다. 또 선생의 생애와 관련된 영상시설이 마련돼 교육의 장으로 손색이 없다.

손병희 선생의 동상은 오늘도 의연한 얼굴로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이 목숨 바쳐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대한민국을 후손들이 잘 지켜가고 있는지를 말이다. 희생을 감내하면서도 선생이 이루려 했던 조국의 독립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우리들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할 때다.

오는 5월 19일은 손병희 선생의 90주기다.

선생의 90주기를 맞아 18일에는 탑골공원에서 추모식이 거행되며, 19일에는 천도교 의창수도원에서 추도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추모식이나 추도식에 참가할 수 없다면, 인근 의암 손병희 유허지를 찾아 선생의 숨결을 느끼고, 그 숭고한 뜻을 한번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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