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남녀
음식남녀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2.05.03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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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머리를 깎다가 텔레비전 방송에서 '음식남녀'(飮食男女)'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뒷전으로 들었다. 먹을거리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영덕의 물가재미 식혜(食醯)와 어떤 곳의 애기 족발을 소개하고 있었다. 조밥을 넣은 식혜는 말 그대로 초밥을 만드는 것이었고, 족발은 앞발이 아닌 발톱으로 만든 진짜 발(足)로 양이 엄청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지만, 리포터의 말이 귀에 걸렸다. '음식남녀 나가신다!'

'음식남녀'라, 1994년 작 이안(李安) 감독의 영화다. 주방장도 나오고, 그 가족애로 시작하여 남녀의 사랑을 그렸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 영화도 한 편의 원조격 영화에서 출발한다. '섹스, 거짓말, 비디오테이프'(Sex, Lies, And Videotape)라는 1989년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derbergh)가 연출한 영화다.

'비디오테이프'의 내용은, 잠자리를 거부하는 아내 대신 처제와 관계를 맺고, 아내는 성불구자인 남편의 친구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동생은 언니보다 자신이 잘 하는 일이 그 일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죄책감이 없었고, 아내는 남편의 친구가 모아놓은 여성들의 고백이 남긴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하고 자신도 그가 든 비디오카메라 앞에서 고백을 하게 된다. 왜곡되고 억압된 현대인의 감성을 잘 드러내, 독립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는 관객상을 받고 칸 영화제에서는 황금종려상을 받은 26살 신인감독의 출세작이었다.

'음식남녀'는, 일류주방장의 세 딸을 소재로 홀아비 아버지와 딸들의 갈등과 애정을 배경으로, 아버지가 옆집 과부네와 새로운 사랑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랑이야기인데도 마치 음식영화처럼 화려한 중국요리가 곳곳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음식광고와도 같은 조리장면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관객들의 감관을 만족시킨다. 이렇게 '먹는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어우러진다.

'비디오테이프'는 관음증과 같은 '보다'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 '음식남녀'는 요리와 같은 '먹다'에 집중하고 있지만, 모두 '보다'와 '먹다'를 사람의 어쩔 수 없는 본능과 연결시키고 있다. 서양사람들은 시각을 강조하고 동양사람들은 미각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둘 다 '하다'의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다. 치유 또는 만족으로-보면서 치유하고 먹으면서 만족하다.

'음식남녀'의 '남녀'의 뜻은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성(性)을 뜻한다. '음식남녀'(Eat, Drink, Man, Woman)의 원뜻은 마시고, 먹고, 사랑하다(Dringking, Eating, and Sex)인 것이다.

출입국신고서에서 자주 발견되는 '섹스'(sex)라는 질문에 남녀표기를 하지 않고 횟수를 적었다는 우스개가 있다. '섹시즘'(sexism)은 성중독주의가 아니고 남녀차별주의를 가리킴을 잊지 말자.

우리가 어릴 때는 '섹시'(sexy)라는 말도 쓰지 못했다. 기껏 '야하다', '고혹(蠱惑)적이다', '농염(濃艶)하다', 아니면, '풍만'(豊滿) 정도를 쓸 수 있을 뿐이었다. 성해방은 이렇게 금기의 단어가 개방되면서 다가온다.

우리말에서 본성을 가리키는 성이 어쩌다 인간성이 아닌 성욕을 가리키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성은 본성이고 본성은 성선설에 입각해서 착하기 그지없는 것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성현들이 보면 놀라자빠질 일이다. 그러나 옛글에서도 '성인(聖人)이 남녀하는 것은 하늘의 길'이라 하니,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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