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부활
죽음과 부활
  • 이제현 <매괴여중·고 교목 신부>
  • 승인 2012.04.23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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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이제현 <매괴여중·고 교목 신부>

얼마 전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불의의 사고로 한 어린 학생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그 학생을 위하여 분향 연기처럼 올리는 기도, 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안식을 누리기를 기원하며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아울러 남은 가족과 친구들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요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지내는 부활시기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쁨을 노래하고 증언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부활과 정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학생의 죽음을 통하여 참된 부활에 대해 다시 묵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내일, 미래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미래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명백한 미래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괄호 안에 넣어서 구석으로 밀어두고, 각자 잇속 계산에 바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해 가급적 미루고 멀리하려는 마음은 무덤의 위치에서도 금방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공경하고 사랑하는 부모, 가족이라고 해도 죽은 후에는 살아있는 우리와 가까이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부활은 죽음을 가까운 묀ㅃ럼 여기며, 준비하는 삶에서 드러납니다. 몇 년 전에 이탈리아의 로마로 성지순례를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와 달리 죽음을 벗으로 삼는 신앙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겉으로 볼 때 로마는 화려한 도시이고, 그 곳의 성당도 거대합니다. 그런데, 성당이 견고해보이는 것은 대리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은 순교자들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의 성당 아래에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당시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장례풍습은 박해로 인해 매장하지 못하고, 지하로 땅을 파서 선반을 만들어 유해를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지순례를 안내해주신 분으로부터 유해를 모실 때 우리나라처럼 죽은 이를 똑바른 자세로 만들지 않았다는 설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에 시신을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와 같은 자세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러한 풍습은 부활에 대한 굳은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영원한 생명을 믿는 이에게는 죽음이 두려운 적이 아니라, 두고 만날 벗이 됩니다. 무한한 존재처럼 살려고 하다가도 죽음 덕분에 유한한 한계를 깨닫고 이웃에게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하기 전에 주어진 우리의 삶을 스스로 꺾거나, 타자에 의해 꺾이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끝까지 사랑하며 살아가는 보금자리로 가꾸는 아름다운 노력을 함께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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