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꿈이 있어 늙지 않는다
아내는 꿈이 있어 늙지 않는다
  • 허세강 <수필가>
  • 승인 2012.04.22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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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허세강 <수필가>

저녁식사를 하면서 아내가 오늘이 자기 인생의 최고의 날이었다고 하였다.

출근해 사무실 난로의 연탄을 갈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단골손님이 이런 것은 경험이 있는 쉰세대가 해야지 해보지도 않은 40대가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연탄집게를 가져가 대신 갈아주더라고 했다. 50대 후반의 할머니를 40대의 아주머니로 봐주다니 눈이 삐었는지 고맙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자신의 미모가 이렇게 출중한지 예전에 미처 몰랐었다고 우쭐하였다.

아내는 5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지난해 말 사직해야만 했다. 구조조정에 의거 해고된 것이 아니고 연초 14일간 남편 회갑여행을 동행하기 위해 사장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의원면직 하였다. 동유럽 7개국을 다니면서 구경할 때는 이 세상을 다 얻은 듯 즐거웠는데 여행을 마치고 귀국해 한 달 보름을 지리하게 나는 백수로, 아내는 백조로 지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하루 24시간을 함께 보냈던 그때는 내게 엄청나게 피곤한 시기였다.

매일 소화가 안된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미칠 것 같다, 우울증이 올 것 같다는 등 온갖 짜증과 한숨을 쏟아내며 투덜대는 아내의 모습에 대책이 없었다. 갓끈 떨어진 백수가 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아내는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해 매주 3회 발행되는 각종 생활정보지를 두루 섭렵하더니 2월 말 마침내 눈에 띄는 구인광고를 찾았다. 자격요건이 45세 이하여서 결격사유에 해당하였지만 아내는 이력서를 지참하고 사장님과 면담하면서 어떻게 설득했는지 제한연령보다 12살이나 많음에도 면접에 합격했다.

그리고 3월 1일부터 매일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3시까지 근무하는 일자리를 얻어 드디어 집안을 탈출하게 되었다. 대신 나는 가사전담(?)의 업무를 해야만 하였다. 비록 아르바이트에 지나지 않지만 매일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되자 그동안 아내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어둠의 그림자는 말끔히 사라지고 남편인 내가 봐도 한층 젊어 보이며 늙지 않을 줌마렐라로 변신하였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일자리인 것 같다.

아내는 앞으로 5년간 일을 더 해 오래된 집안 가구를 교체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오늘도 힘찬 발걸음을 내딛으며 직장을 향한다. 요즘 나는 일자리가 있는 아내가 한없이 부럽다. 아내는 꿈이 있어 늙지 않는다. 1년 가까이 백수로 지내다 보니 어떤 날은 내가 점심을 집에서 챙겨 먹었는지 외식을 하였는지 가물가물하고 가끔은 조금 전의 일도 기억이 나질 않아 한참을 생각해야 하는 어리버리가 되어가고 있다.

정년퇴임 해 1년만 집에서 놀면 바보가 된다더니 내가 곧 그렇게 될 것 같다. 나도 아내처럼 늙지 않으려면 꿈이 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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