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존경
자기존경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2.04.19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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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다행히 우리 사회에도 돈을 벌어 자랑스러운 사람과 집안이 있었다. 가깝게는 유일한을 꼽고, 멀리는 조선시대의 경주 최부자를 꼽는다. 유일한(1895-1971)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로 시작하여 마침내는 소유조차 기부함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기여가 무엇인지 보여주었고, 최부자댁은 사회적 기여를 하면서도 자신들의 부를 500년 동안(9대 동안 진사, 12대 동안 만석)이나 유지시킴으로써 그 둘이 상충되지 않음을 보여준 본보기였다. 그런데 그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기득권의 유지와 관련이 있다. 유일한은 혈족의 기득권을 포기함으로써, 최부자네는 혈족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둘 다 사회적 모범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둘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더 이상적일까? 현대적 가치관으로서는 오히려 유일한이 더 선호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전통적 가치관에서 집안은 물론 정부조차 혈족의 계승체계가 사회구성의 원리였기 때문에 당시의 사고로서는 최씨 집안이 더 유교적 가치관에 적합했을 것이다. 이른바 '국가'(國家)라는 말처럼 나라를 집의 모임으로 보는 사고방식 곧 그러하다. 만일 오늘날 유행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 의무의 관점에서 보면 어떠할까?

'노블레스'는 고귀한 신분을 가진 귀족을 뜻하고 그 계급은 태생적으로 세습되는 것이니, 유일한의 경우는 이에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최부자댁은 세습양반이라는 점에서 흡사하다. 그러나 고려시대 과거제 도입 이래로 일정한 관직의 유지를 통해 양반신분, 정확히는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다소 다른 점이 있다. 물론 귀족도 몰락할 수 있지만, 프랑스의 귀족은 우리처럼 과거라는 시험제도를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왕실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존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귀족의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신분의 유지를 위해 현실적으로 필수불가결했을 것이다. 유럽에 과거제가 있었다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관념이 생겨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최부자네의 양반적 의무감은 유교의 실천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최부자네의 사회기여가 유럽귀족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보다 더욱 자발적이고 무보상적이다. 부를 유지하려는 사욕을 위해 타인에게 봉사하는 태도는 아무리 동기론적으로 비도덕적일지라도 결과론적으로는 선을 담보하기 마련이며, 게다가 노블리스 오블리주처럼 의무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지위를 유지하려는 '양반의 의무감'(obligation)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명예를 유지하려는 '양반의 자긍심'(pride)에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양반문화'는 자기존경의 한 형태라고 믿는다.

유일한에게서도 자기존경의 극단적인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나이 쉰에 미국에서 낙하, 침투, 폭파 훈련을 받는다. 미정보국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 평생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정보공개가 되면서 이 사실이 드러났다. 사회적으로 안정적이었으며, 젊은이에게 책임을 미룰 만한 나이인데도, 그는 그렇지 않았다. 자기가 할 일은 자기가 하고자 했다. 이것이야말로 유일한을 이해하는 열쇠다. 식민지인으로 사는 안락함보다는 독립국인으로 사는 명예를 얻고자 그는 각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남이 뭐라던 내가 나를 존경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그것이 자기존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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