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이 행복한 사회를 기다린다
작가들이 행복한 사회를 기다린다
  •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 승인 2012.04.17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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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복사꽃이 흐드러진 봄날에 귀향한지 3년 되었다는 화가가 갤러리를 찾아 왔다. "연로하셔서 일상이 힘든 부모님도 모시고 원 없이 작품도 하고요. 초짜 농부지만, 밭뙈기 조금이랑 과실나무도 몇 개 가꾸지요." 커다란 눈망울을 껌벅이며 착하고 진실한 목소리로 말하는 화가가 정말 훌륭하게 생각되었다.

여름엔 검게 그을린 얼굴로 복숭아를 들고 왔다. "농사가 생각보다 힘들어요. 비가와도 걱정, 바람 불어도 걱정,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작황은 별로예요." 농약 한번 안했다는 복숭아 속에는 작가의 착하고 순수한 마음이 함께 하는 것 같아 맛있고 미안했다.

찬바람이 더욱 거칠어진 가을 날 화가는, "밭 하나 가득 무 농사를 지었는데, 무가 크긴 한데, 껍질이 깨끗하지 않아요. 무값도 없고, 계약재배했는데, 안 가져가니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저런, 이제 그 많은 무를 어쩌지요?" 라고 묻자, "밭 가운데 무 동산을 만들어 덮어 놨지요. 혹시 계약한 사람이나 나중에라도 찾는 사람 있으면....." 화가는 부족한 가을걷이를 끝내고 11월에 개인전을 열었다.

작품이라도 많이 팔리면 싶었지만, 작가의 노력에 비하면 그다지 비쌀 것도 없는 작품판매는 시원치 않았다. 갤러리 역시 끌어안아 줄 형편이 못 되어 죄인처럼 미안함만 가득했다. 작가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작가들이 행복한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들은 화려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일상에서 오직 작품 하는 시간이 있음에 자부심을 갖는다.

지난 7일 세계 최대 부호, 멕시코 텔맥스텔레콤의 카를로스 슬림 회장이 삼성미술관 '리움'과 '플라토'를 잇따라 관람했단다. 1999년 개관한 플라토는 국내 최초이자 세계 8번째의 로댕 작품 상설전시 공간이다. 슬림 회장은 로댕의 열렬한 애호가로, 작고한 부인과 함께 무려 380여점의 청동 조각과 예술작품들을 수집한 최대의 로댕 작품 개인 소장자라 한다.

이번에도 자신이 소장하지 못한 로댕의 '지옥의 문'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단다. 유명미술관에서 하는 전시는 대부분 소장전이고,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을 얼마만큼 소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 미술관의 유명세와 같다고 보면 맞다. 절대적 부(富)의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인 미술관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지역의 관 미술관(갤러리)이나, 개인 미술관에선 특정 작가의 개인전이나 단체전을 열어주는 것으로 그 몫을 다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젠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작가도 기타 미술협회 회원도 아닌, 일반인 소장전 발표나 기회의 부축임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미술품이 그저 예의상 인맥으로 하나 사 주는 인사치레를 떠나서, 작품이 좋고 작가가 좋고 그 삶의 진정성이 좋아서 한 작품이라도 소장하고픈 마음을 갖게 해야 한다. 그리해 작품을 사고 모아 전시하는 자부심이 더 큰 사회 분위기가 됐으면 한다.

누구나 남에게 없는 귀한 것을 갖게 되면 슬쩍 자랑하고 싶어진다. 갤러리의 기원 또한 귀족들이 건물의 긴 회랑(복도)같은 곳에 자신의 귀한 소장품을 진열하여 부와 명예를 은근히 과시하던 공간이었다.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작품들은 소장자를 건너가면서 무한한 생명력으로 새롭게 평가되고 새롭게 태어난다.

개인 소장전의 일반화로 작품하나 정도는 소장하고 싶다거나 소장할 수 있다는 생각의 변화를 이끌어 냈으면 싶다. 특별한 사람들만 미술품을 소장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술품 서너 개 정도는 소장할 수 있는 사회를 고대한다. 눈망울 크고 깊은 화가의 작품이 이집 저집에서 행복가치로 소장되길 바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갤러리를 찾아왔던 호호백발 허리 굽은 화가의 노모가 보여주던 눈빛의 대견함이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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