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편지
손 편지
  • 이효순 <수필가>
  • 승인 2012.04.15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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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

'목련꽃 그늘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이 계절이 되면 박목월님의 4월의 노래가 생각난다. 그 노래를 부르며 봄을 맞이하던 여고시절은 푸르름으로 눈과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 아득히 먼 시절이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설렌다. 유난히 편지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 그 끈을 놓을 수가 없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면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에 볼펜이나 만년필을 잡게 된다. 왠지 추스르지 못하는 감정을 손으로 적어 마음 한곳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내고 싶다.

며칠 전에 봄 빛깔이 담긴 편지지에 손 편지를 몇 장 썼다. 가깝게 지내던 지인들에게 틈새 시간을 내어 쓴 우편으로 전해진 편지는 서로의 믿음과 기쁨으로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다. 친밀감이 더해진 삶은 윤택해지고 평안해진다. 편지를 받을 때의 기분은 써서 보내고 받은 사람만이 알게 된다.

언제부터인지 '손 편지'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현실은 디지털 문화에 많은 사람이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의 등장과 더불어 사람이 소외되고 기계와 상호작용하므로 사람과의 어울림이 오히려 어색한 느낌마저 든다. 느리지만, 그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편지는 더 정감어린 감정을 전할 수 있다.

편지라는 말이 손 편지라는 말로 바뀐 것은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은연중에 변했다. 빠르게 변하는 정보화의 물결 속에 이메일, 페이스북, 문자 메시지에 밀려 골동품처럼 생각되어 생소한 느낌의 손 편지로 바뀌어가고 있다.

젊은 시절 유난히 편지를 많이 썼던 것은 아마 말이 별로 없는 성격이기에 글로 마음을 표현했던 것 같다. 비 내리는 날은 밤이 이슥하도록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객지의 외로운 산마을 생활은 내면적으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나를 만들어 주었다. 그때는 잉크를 찍어(묻혀) 펜으로 글씨를 썼다. 날렵한 펜으로 쓰는 글씨는 힘이 있고 나름대로 개성이 있어서 옥양목에 풀을 먹여 다림질한 베갯잇처럼 상큼한 느낌을 갖게 했다.

편지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순수한 감정으로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작은 손으로 써내려간 글씨는 컴퓨터 자판으로 두드린 활자체 글씨처럼 고르지는 않지만 조금 모자람이 있는 부분에 그 사람의 체취가 묻어 있고 마음이 담겨 있기에 더 정이 간다. 요즘처럼 인성을 강조하지 않아도 그 사연 속에 서로의 정이 녹아있어 자연스럽게 소통이 되고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출근길에 먼저 눈길 닿는 이웃집 담장 안에 하얗게 핀 백목련이 나를 부르는 듯하다. 어느새 우리 집 작은 앞뜰에는 봄꽃들이 하나 둘 피기 시작한다. 흰 진달래, 털 진달래, 노루귀, 앵초, 금새우란과 탐스런 윤판나물의 꽃봉오리까지.

오늘은 봄꽃들의 고운 소식을 내 마음과 함께 손 편지에 적어 보내고 싶다. 내 마음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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