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종으로서의 자동차
새로운 종으로서의 자동차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2.04.05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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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자동차가 거리를 활보한다.' 활보(闊步)란 활기차게 걷는다는 것으로 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이를테면 '연쇄살인범이 거리낌 없이 밤거리를 활보한다'처럼 말이다. 자동차에게 쓰는 올바른 표현은 질주(疾走)가 옳다. '자동차로 국토를 종횡무진(縱橫無盡) 질주했다'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내가 활보라는 표현을 쓰는 까닭이 있다. 자동차는 거리를 질주할 뿐만 아니라 활보한다. 때로는 활보만이 아니라 출몰하고 위협하고 공격한다. 거리의 주인은 사람인데 자동차가 주인인 양 활보한다. 골목길에서는 사람을 놀래며 갑작스레 출몰하고, 건널목에서는 사람을 위협하고, 큰 차들은 위협을 넘어 사람을 공격하기도 한다.

어떤 환경론자들은 선언한다. 인류를 위협하는 새로운 종(種: species)이 탄생했다고. 식인종이 무섭더니, 이제는 자동차 종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종은 식성이 대단하다. 금속으로 된 몸은 전 세계의 철을 찾기 위해 세계를 후비고 다니게 한다. 고무로 된 발은 열대의 플랜테이션을 발흥시키고, 멋진 단장으로 화학도료 산업을 번성시킨다. 작은 부분은 말할 것도 없다. 유리, 플라스틱, 섬유, 가죽 등 어디 한군데 내버려두는 곳이 없다.

이 새로운 종의 진짜 대단한 식성은 따로 있다. 지구 속에서 오랫동안 잘 익고 있은 석유를 주식으로 삼아 마구 먹어치운다. 몸치장을 위해 쓰는 석유화학제품은 오히려 작은 부분이다. 이 새로운 종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동안 잘 익혀둔 지구의 액체를 쪽쪽 빨아먹지 않을 수 없다. 광 뒤에 숨겨둔 잘 익은 술을 이들은 한 번에 마셔버리고 취한 채로 지구 위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종은 사람이 사는 곳을 더욱 비좁게 만든다. 집에도 이들을 위한 차고가 마련되어있고, 그렇지 않을 때는 더 심각해서 우리가 걸어 다니는 길의 일부를 차지하고야 만다. 좁은 골목에서는 길의 반을 잡아먹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거리는 사람의 홍수가 아니라 차의 만원사례다. 이 새로운 종이 죽을 때는 더 하다. 벌써부터 공터에는 이들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는 경우도 많지만, 죽을 때 이들이 뿜어내는 공해는 일찍부터 인류를 위협했다. 이른바 폐차장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시체안치소 또는 화장장은 공동묘지의 수준을 넘어 우리의 생활환경을 한껏 더럽히고 있다. 납작하게 눌려진 이들이 한꺼번에 이동되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의 시체가 그만큼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의 핏줄이자 신경조직인 전기장치와 전자기기는 중금속을 다량으로 함유하고 있어 함부로 버리지도 못한다.

서양어에서 '탈 것'(vehicle)은 폭넓은 뜻에서 운송수단을 가리킨다. 말도 되고, 자전거도 되고, 우주선도 된다. '어떻게(What kind of vehicle) 오셨어요'라고 물을 때, 우리는 자동차를 많이 생각하지만 사실은 너무 많은 대답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질문과 답이 모두 새로운 종에만 쏠리고 있다.

자동차가 외계인이었다는 영화가 유행이었다. 외계인이 자동차로 변신을 했다는 것인데, 그것처럼 자동차는 이미 우리 주위에 우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종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놈은 물건이고 우리는 그것을 움직이고 있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주인이고 그 놈이 노예인 것 같지만, 곰곰이 돌이켜보면 그 놈이 주인이고 내가 노예라는 망칙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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