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
  • 신상구 <천안중학교 교사>
  • 승인 2012.04.02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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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신상구 <천안중학교 교사>

2012년 4월1일은 아우내장터에서 천안, 진천, 청원, 연기 지역 주민 3000여 명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힘차게 흔들며 목이 터져라 항일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지 93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은 호서지역 최대의 항일독립만세운동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조병옥 박사의 부친인 조인원 선생이 오후 1시경 아우내장터에'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웠다. 그리고 그가 태극기를 들고 시장 군중 앞에서 이백하 선생이 기초해 구국동지회 이름으로 서명한 '아우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유중무, 유중권, 조병호 등이 함께 큰 소리로 항일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아우내장터에서 50보 정도 떨어진 병천1리 289-5.6번지의 구 장터에 위치해 있던 헌병주재소의 고야마(小山) 소장 등 5명이 만세 소리에 깜작 놀라 시위 현장으로 출동했다. 그들이 시위 군중을 향해 해산을 요구했으나 시위는 가라앉지 않고 계속됐다.

그러자 일제 헌병들이 시위 군중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발사해 현장에서 김구웅, 유중권, 이소제, 김상헌, 박병호 등 17명이 즉사했고, 30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상자의 친지들이 너무 분통해 시신을 헌병주재소로 옮기고 항의를 계속했다.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이순구 등도 시위 군중 100여 명을 이끌고 헌병주재소 앞으로 가서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며 주재 소장 고야마(小山)에게 사망자에 대한 적절한 조치와 유치장의 구금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는 항의 시위를 벌였다.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이 끝나자마자 20여 명의 항일독립투사들이 체포되고 구속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유관순 열사는 형무소에서도 일제에 저항하며 격렬한 항일독립만세운동을 계속 전개하다가 그 다음 해인 1920년 9월 28일에 순국했다.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호서지역 항일독립만세운동 중에서 규모가 가장 컸다는 것과 독립선언서를 자체 제작해 선언함으로써 독립선언서의 지역화를 기했다는 것이다. 포암 이백하 선생이 구국동지회 명의로 자체 제작한 아우내 독립선언서는 한국의 항일독립운동사상 아주 드문 사례로 지역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에 아주 중요한 향토 사료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강단사학자들이 아직까지 진본이 발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 제93주년을 맞아 아쉬운 점은 봉화가 실제로는 기미년 3월 31일 밤에 타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주최 측이 봉화제 행사를 전국적인 행사로 도약시키기 위해 해마다 3월1일 아우내장터에서 개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우내장터 항일독립운동은 종합적인 계획과 독립선언서 기초를 맡은 이백하 선생, 자금을 담당한 유중무 선생, 태극기 제작과 시위를 주도한 유관순 열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조인원 선생 등이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칠 정도로 유관순 열사 위주로 각종 선양사업을 전개하여 유관순 열사만이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빛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는 관계 당국이 항일독립투사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 사업을 균형적으로 하여 항일독립투사들 중에 억울한 이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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