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봄비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2.04.02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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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모처럼 심야영화를 보고 집까지 걸었다. 깊은 밤에도 잠들지 않는 도시는 화려하고 관능적이다. 쉼 없이 돌아가는 네온사인에 공연히 외로워지고 객기라도 부리고 싶은 마음이 드니 말이다. 음주가무에 능하지 못한 재미없는 사람이기에 저 불빛 속에 섞여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무심천을 따라 걷는 밤길이 새로웠다.

옆 지기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어둠 속, 무심천 벚나무는 젖꼭지처럼 통통 불은 꽃눈들로 환했다. 출산에 임박한 산모가 숨고르기 하듯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꽃망울을 살짝 건드리며 '내일이면 피겠다' 했더니 '내일 춥대.'라는 짤막한 대답이 옆에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더니 추웠다. 강원도 어느 지방엔 봄눈 소식이 있었다. 벙근 꽃눈이 얼까 공연히 노심초사한다.

'봄 봄' 하고 앵무새처럼 떠든 지 오래인데 기다리는 봄날은 더디기만 하다. 하지만 아무리 맵고 추워도 봄은 봄이다. 매운바람, 찬 눈도 봄 자 뒤에 붙여놓으니 그 또한 훈풍처럼 아늑한 느낌이 든다. 일기예보엔 또 비소식이 있다. 금방 비가 내릴 듯 잔뜩 날이 흐리다.

창가에 앉아 조용조용 사록사록 내릴 봄비를 상상한다. 나무 우듬지마다 달강달강 매달린 빗방울들이 눈에 선하다. 말갛고 순수해서 마음마저 경건하게 만드는 봄비는 봄을 데려오는 소리다. 봄비 뒤 봄빛은 더욱 짙어간다. 봄비 한번에 대지마다 촉촉하게 생기가 돌고 봄비 한번에 어린 연두물이 스며든다.

봄비 소리는 깊은 울림을 가졌다. 오랜 잠에 빠진 묵은 씨앗도 불러낸다. 꿈쩍 않을 것 같은 단단한 땅에서도 생명들을 키워낸다. 가만가만 속삭이며 내리는 비는 움츠린 마음도 흔들어 깨운다. 사람들이 보고 싶고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 몸이 가렵다. 오랜 벗들과 훌쩍 봄빛을 따라 먼 여행을 떠나고 싶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요즘 세상 밖은 춥고 바람이 차다. 제주 구럼비가 중장비에 몸살을 앓고 북한 미사일발사를 앞두고 복잡하게 국제관계는 얽혀들고 있다. 공연히 방어를 핑계로 한 무기경쟁으로 동아시아가 위험지역이 될까 염려스럽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후 어려움을 호소하는 농어민들의 집회도 늘었다. 정치권은 민간인사찰 문제로 공방이 치열하다. 물가는 치솟아 장바구니 고민도 늘었다.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나만 믿고 따라오라 목소리를 키우지만 선뜻 손잡을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4·11총선을 앞두고 수많은 공약들이 쓰나미처럼 눈과 귀를 덮친다. 봄바람처럼 날아오는 수많은 공약 중 어떤 것이 우리 서민들의 삶을 꽃피워줄 훈풍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래도 새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우리 역사도 혹독한 꽃샘추위 끝 천천히 봄이 왔으니. 4·11 총선도 촉촉한 봄비가 되어 우리에게 긍정의 힘을 갖게 해줄 포근한 봄날을 불러오리라는 믿음과 기대를 뜨겁게 뛰고 있는 후보들에게 걸어본다.

비 그치면 오랜 벗을 불러 들길을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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