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은 몸으로 도망가기
벗은 몸으로 도망가기
  • 이근형 <포도원교회 담임목사>
  • 승인 2012.03.26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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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이근형 <포도원교회 담임목사>

기독교는 지금 사순절의 기간이다. '기도', '절제', '묵상' 등의 단어들로 그리스도를 삶 속에 깊이 새기며 내면을 성숙시켜가는 시간이다. 그리스도를 깊이 새긴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헌신, 즉 우리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우리의 몸을 통해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한 출발점에서 헌신(獻身)과는 반대되는 보신(保身)의 행보를 나타낸 예수 주변 인물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 중 하나는 한 청년이 예수의 체포현장에서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있다가 함께 체포되는 위기 상황에서 그 두른 천을 벗어던지고 줄행랑을 친 기록이 함께 전해온다. 그 기록은 마가복음에 나오는데, 묘하게도 그 비겁한 청년은 다름 아닌 마가복음의 기록자인 마가 자신이었을 거라고 성서학자들은 전하고 있으니 흥미롭다.

그는 왜 그 부끄러운 자신의 추억을 묻어두지 못하고 중요문서인 성경에 굳이 기록했을까 무역상인 부호의 아들이요, 마리아라는 이름의 믿음 깊은 어머니의 아들. 그리고 바나바라는 성자 같은 사도의 조카인 그도 처음에는 어쩔 수 없는 회의(懷疑)론자요, 시큰둥한 비 신앙인이었다. 그런 청년기에 생각 없이, 얼결에 따라갔던 예수의 기도동산에서 함께 체포될 상황이었으니 줄행랑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여러 과정을 거쳐 목숨까지라도 내어놓을 수 있는 헌신자가 되고, 특히 마가복음이라는 복음서를 기록하던 시점에 이르러서는 그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그날에 대한 기록은 피를 토하는 반성문이요 땅을 치고 통곡하며 드리는 회개인 것이다. 윤동주의 시 참회록에 나타났듯이 "그때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을까"라는.

최근 이 사회는 정치권의 부르짖음으로 가득 차 있다. 저마다 국가와 민족을, 지역 일꾼으로 헌신할 기회를 달라는 부르짖음이다. 묘하게도 그 부르짖음 속에서는 그 철없는 청년 마가, 벗은 몸으로 도망하는 청년의 모습도 보여짐은 왜일까 공천 탈락 후의 분노에 찬 표정이라든지, 서로를 향한 비난전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정치권이 생존을 위한 부르짖음이 한창인 지금 한쪽에서는 작년부터 차분하게 진행되어 온 한 야구선수의 헌신이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된다. 박찬호. 그 이름으로 사회에 충분한 자긍심이 되어있는 그가 한국야구의 중흥을 위해 모든 야구인들의 양해를 얻어 한화 이글즈에 입단해 조용한 기쁨을 선사하고 있다. 그의 유명세와 영향력, 실력을 볼 때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서 구단측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 야구계를 향한 헌신인 것이다. 그에게 예우를 갖춰 구단이 제시한 얼마의 금액도 유소년 야구발전을 위한 기금으로 내어놓았다지 않은가.

중국의 고사 '진가의 결혼식'이 생각난다. 어느 날 진씨 성을 가진 집에서 잔치를 위해 짐승을 잡으려 한다. 그러나 짐승들은 하나같이 자신은 그 집에서 유익한 존재이니 다른 놈을 잡으라고 피한다. 누구도 죽기를 거부하는 상황에서는 잔치를 벌일 수 없다. 화가 난 주인이 짐승 모두를 잡아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짐승들이 눈물의 결단을 주인에게 보인다. 모두가 자기가 죽기를 거부해서 오게 된 위기이니, 자신이 먼저 죽겠다고 나선 것. 이런 결단을 들은 주인은 그런 감동의 짐승을 하나도 죽일 수 없다며 짐승의 죽음이 없는 잔치를 선포한다. 서로가 죽지 않으려 할 때 모두가 죽게 되고 서로가 먼저 죽으려 할 때 모두가 살아나는 기쁨.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십자가 죽음의 교훈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가복음 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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