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은
  • 이진순 <수필가>
  • 승인 2012.02.28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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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진순 <수필가>

경험은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 다만 학비가 비쌀 따름이라고 카알라일은 말했다.

때때로 한 번지수에 사는 사람이 미워지는 때가 있다. 모든 것을 훨훨 털어 버리고 어디론가 꼭꼭 숨고 싶다. 그러나 언제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원 위치에 서 있는 나를 나는 사랑한다. 그리곤 후회하며 못나고 천치 같다고 자신을 학대하고 싶은 때도 없지 않았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친정어머니가 그립다.

서로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라 한 가정을 가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내와 어미의 자리는 막중하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성격이 비슷하다. 똑같이 불같은 성깔은 가랑잎에 불붙이듯 한바탕 후닥닥거리며 전쟁을 일으키곤 했다. 그런 날이면 남편이 타인처럼 느껴졌다. 후유증으로 열병을 앓았던 적도 많았다. 그런 날은 머릿속은 마치 깡 말라버린 표주박처럼 흔들렸고 가슴은 까맣게 숯덩이가 되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화날 때 같으면 이혼을 몇 번이고 했을 테지만 친정어머님의 살아온 인생을 떠올리고는 차분함을 되찾곤 했었다.

어머니는 일찍 혼자되어 삼남매를 키우며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난과 싸우셨다. 어머니 인생은 없고 오직 자식을 위한 삶이 전부였다. 내가 당하고 겪는 고통은 그에 비하면 호사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착한 남편은 술을 좋아한다. 술에 취하면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가 되었다. 아무렇게나 걸러지지 않은 표현으로 화살을 쏠 때는 내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다. 덕이 부족한 탓인지 술버릇이라 치부해 버리면 속 편할 일이지만 순간을 참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날은 남편의 술버릇을 도저히 용서하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더 이상 함께 살 가치가 없다는 판단이 섰다. 아이들 제 밥 찾아 먹을 만큼 머리 굵어졌겠다, 지금까지 아내와 어미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는 교만이 마음가득했다. 북받치는 설움에 농속에 옷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사방이 어두움에 쌓인 뒷동산을 올랐다.

그곳에는 공동 쓰레기 소각로가 있다. 옷을 풀어 쌓아 놓고 불을 붙였다. 지진부진 여자이기 때문에 인내하며 살아온 숨 막힌 사연들과 함께 불 길속에 나는 무녀처럼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마치 내 육신이 불타고 있는 듯 했다. 싸하니 가슴 한 귀퉁이가 시원해 옴을 느꼈다. 그러나 한줄기 밧줄처럼 끈 하나가 나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던가. 불기둥 사이로 어머님의 노한 환상이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소각로에 불꽃은 가물거리며 꺼져 갔고 옷가지들은 한줌의 뽀얀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

사방은 또다시 어두움이 삼켜 버렸다. 털썩 주저앉아 바람에 나부끼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 발자국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달빛에 비친 내 그림자가 보호자처럼 따라 오고 있었다.

내게도 부모와 형제가 있지만 남편 하나 믿고 고생을 고생이라 여기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홀대를 하다니 벌을 주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아직 다 풀리지 않은 감정을 다독이며 방문을 열었다. 알콜 냄새는 방안 가득했고 코고는 소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스럽다. 사랑한다는 것은 미움까지 포용해야 되는 건지도 모른다.

강산이 세 번 바뀌고 이제 몇 해 후면 네 번의 탈바꿈을 할 것이다.

늠름하고 잘생긴 청년이 아닌 중후한 노인으로 변해 가는 남편의 주름진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 살아온 세월의 정이 끈끈함을 실감케 하는 밤이었다.

이 글은 오래전에 써놓은 글이다. 환자가 된 남편을 바라보며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을 하며 세상에 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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