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슬프게 우는 오후
봄바람이 슬프게 우는 오후
  • 반숭례 <수필가>
  • 승인 2012.02.20 22: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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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반숭례 <소설가>

선생님.

머뭇거리던 봄바람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두 손을 벌린 채 서 있는 나뭇가지 속을 파고듭니다.

새 봄을 기다리는 나무들의 부푼 희망을 품어주는 봄바람이 그 가지들에게 따스한 햇살을 감아주며 싹을 틔우려 합니다. 겨우내 그 누구하나 관심조차 가져다주지 않았지만 사람들처럼 투정이나 질투 따윈 내 비추지 않고 묵묵히 제자리를 지켰습니다.

봄은 마당가 감나무 가지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잔가지가 많아서 인지 봄바람은 이 가지 저 가지를 돌고 돌며 숨넘어가듯 웃습니다. 비워둔들 잃을 것도 몰래 따갈 열매도 없는 나무는 바람이 불면 따라 흔들리고 눈이 쌓이면 무거운 대로 눈을 털어 내립니다.

사람들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려 하지 않고 자연이 주는 순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귀를 열어야 봄을 알리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고 대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그동안 침침해 있던 집 가장자리 빈 화단 속 겨우내 씨앗을 품어서 새싹을 키운 꽃씨 한 톨 헤집어 놓을 것입니다.

햇살은 따스하지만 살 속을 파고 도는 바람이 차가운 오후입니다. 봄빛 따라 뒷산으로 올라가니 바람이 슬프게 울며 지나갑니다. 나뭇가지 사이에 서서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눈물이 나려 합니다. 조용하면서도 부드러운 겨울바람에 비하면 봄에 부는 바람은 살 속을 파고드는 매서움이 있다고들 하는데 나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그리움이 컸으면, 기다림에 지쳤으면 아마도 정이 그리워 사람들 가슴속을 파고드는 슬픈 바람이 되지 않았겠냐고요.

선생님.

나무들은 사람들을 무서워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동네마다 송전탑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송전탑을 세우기 위해 아름드리 소나무가 뿌리 채 뽑혀있고 허리가 몇 동강이 난 채로 나동그라져 있는 나무눈에는 피고름 같은 진액이 흘러나와 뭉개져 있습니다.

또한 몇 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고 지나가는 곳에는 동네 사람들의 건강까지 해칠 수도 있겠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온 동네를 헤집고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자원이 되는 나무들인지, 자연이 훼손되는지 먼 앞날을 내다보지도 못하고 지금 당장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바라만 보고 있는 나무들은 불평불만 한마디 하지 못합니다. 내 손톱에 박힌 가시가 아파서 병원을 찾아가는 심정이나 생가지가 뿌리 채 뽑히고 잘려나가는 나무들 수난의 고통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아픔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의 흐름 따라 썩어가는 나무 가지를 쳐 내는 것은 새로운 가지를 키우기 위해 받아들이는 자연의 겸손함이지만 가지를 치는 것도 바람 몫이요, 새싹을 틔우는 몫도 자연의 몫이지요. 쓰러져 있는 나무쪽에서 혼자서는 기어 나오지도 못하고 바깥세상이 궁금했던 아기 산새 한 마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엄마를 부릅니다. 세상으로 먼저 나간 친구를 부릅니다.

우수가 지난 들녘엔 쌓였던 낙엽과 마른풀을 태우는 농부들의 발길이 잦았습니다. 낡은 것과 묵은 것을 태우고 빈 마음으로 또 다른 푸른 싹이 돋아날 씨를 뿌리기 위해서지요.

봄은 벌거벗은 나뭇가지들에게 파란 새싹이라는 새 옷을 입혀주고 희망이라는 입김으로 파란 생명을 불어 넣어 줍니다.

선생님 또 소식 올리겠습니다. 평안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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