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 이야기
대보름 이야기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2.02.09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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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대보름날 어머니는 우리를 잠 못 자게 하셨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말이었는데, 졸음을 참지 못한 날이면 아침에 거울에 비친 밀가루 떡으로 하얗게 분장 된 눈썹에 놀라야 했다. 왜 잠을 자면 안 되었을까? 왜 신발짝을 어지럽혀 놓아야 했을까? 왜 부럼을 까먹고 귀밝기 술을 마셨으며, 오곡밥을 해먹었을까?

정월 대보름은 우리 전통에 따르면 진정으로 새해가 오는 날이다. 이론적으로는 동짓날부터 음이 꺾이고 양이 시작되는 날이며, 실제적으로는 꽃피는 춘삼월에서야 봄을 실감할 수 있지만, 정말 새해가 왔다고 느끼는 때는 바로 1월 보름날이었던 것이다. 그믐을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깜깜한 날은 생각으로나 첫 날일뿐이다. 휘영청 밝은 보름이야말로 한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오는 날로 삼기 좋다. 세월의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기준은 달·달력이다. 보름달을 열두 번 보면 한해가 간다. '그믐을 열두 번 보면 한해가 간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이지도 않는 그믐은 그래서 환한 보름에 밀린다.

아침에 부럼을 까면서 생각한다. 언제까지나 내가 이렇게 단단한 호두를 이빨로 깔 수 있을까? 이가 만복의 근원이라는데, 나이가 들면 엄두도 못 내겠지. 그러고 보면 부럼은 새해의 건강검진이다. 그리고 그 성공에 귀가 밝아지라는 소원으로 축배를 들 일이다.

오곡밥과 나물들. 우리가 한 해 동안 먹을 것들이다. 쌀, 콩, 팥, 수수, 조 등, 우리를 살리는 곡식이다.

한해 동안 먹어야 할 것을 한해가 바뀌는 날 나물들과 함께 먹는다. 일년치를 줄여서 하루에 먹는다는 것, 정말 재밌지 않는가.

밤은 새고 볼 일이다. 새해맞이 축제(Happy New Year Party)는 동서를 막론하고 밤새워 술 마시고 논다. 뉴욕의 타임스퀘어가 되었던, 북경 골목의 폭죽놀이가 되었던, 종로 보신각의 제야의 종소리가 되었던 사람마음은 거기서 거기다. 한 해를 보내고 한해를 맞으면서 그냥 엎어져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타임스퀘어에서 공이 내려오던, 동네에서 달집을 태우고 쥐불놀이를 하던 들떠있기는 마찬가지다. 밤의 놀이에 불놀이가 빠질 수는 없다.

그러다 보니 졸리고 배고프다. 그래서 나와 돌아다니다 이 집 저 집 다니며 훔쳐 먹으라고 마련해둔 밥을 '훔쳐 먹는다', 이렇게 묵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 미움도 버리고 사랑도 얻는다.

새해에 액운을 주려고 그날 찾아온 귀신들은 멍청하게도 신발의 짝을 맞추다가 아침까지 다 못 헤아리고 떠나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발을 섞어놓거나 숨겨놓는다. 신발은 내가 한 해 동안 별일 없으리라는 염원과 관련된다. 귀신도 인간의 간계를 못 당한다. 하다못해 아침에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 더위!'를 외치면서 더위까지 팔았으니, 날씨는 이기지 못해도 더위는 넘기고자 했다. 이렇듯 대보름은 정말 세시풍속의 황제다.

오곡밥과 나물을 먹으면서 세시풍속은 전통승계의 정말 좋은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를 살리는 것을 먹으면서 기린다는 것, 정말 뜻 깊다.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일 년 내내 먹을 것을 새해맞이로 먹는다는 것, 정말 좋은 일이다. 오곡밥과 나물은 '한국인의 요약밥상'(a compact table)이다.

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안다. 오곡밥도 먹어보지 못한 놈이 어찌 비슷한 밥상을 대접받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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