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말을 위하여 건배
잃어버린 말을 위하여 건배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2.02.07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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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도심 아파트에 사는 내게 위안이 되는 낭만을 묻는다면 주저없이 달을 꼽겠다. 전원에서 즐기는 달빛만은 못하지만 잠들지 못하는 밤 거실에 나오면 반겨주는 달이 있어 행복하다.

초저녁에 잠깐 머물던 달이 느리게 자신을 채워가고 비워가는 모습은 경건함을 갖게 한다.

그 중 나는 그믐달이 좋다. 박명 속에 홀로 푸른빛을 쏟아내는 새벽달은 가슴 아리다.

옛 시인들은 어여쁜 머리빗 같다고 했지만 활처럼 휘어 돌아간 그 곡선에서 나는 냉랭하고 차가운 결기를 느낀다. 머릿살을 서늘하게 만드는 그 명징함이 좋다. 아마 새롭게 떠오를 신월을 품었기에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

최명희의 '혼불'에서도 '보름의 달은 지상에 뜨는 온달이요, 그믐달은 지하에 묻힌 온달'이라 했으니 넉넉하게 세상을 품는 보름달이 없다면 그믐달 또한 별다른 의미가 되지 못했을 게다.

한해의 건강과 복을 기원하는 정월 대보름을 맞아 떠들썩한 분위기에 휩쓸려 나물 몇가지와 부럼을 준비했다.

올해는 귀밝이술을 따로 준비하는 수고로움도 덜었다. 술맛은 알지 못하지만 누룩내 적당한 맛있는 술이라는 지인들 말에 끌려 염치 불구하고 얻어온 사연을 생각하면 지금도 약간의 미안함과 함께 배시시 웃음이 돈다.

지난 주말 오랜 지기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바닷가에서 넉넉한 아주머니 인심에 점심을 맛있게 먹고 둘러볼 만한 곳을 찾다 지도에서 '하늘 바람 길'이라는 예쁜 이름을 발견했다.

하늘 바람 길이 위치한 내현리는 지형 생김에 따라 '거북이 마을'이라 불리는 데 전통체험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앞마당에 차를 세우고 들어가는 길을 물으니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러워 위험하다고 막걸리나 한잔 하고 가란다.

대보름 준비로 모여 있던 마을 유지들이다. 대보름을 맞아 오방제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마을에 온 손님이라며 따뜻하게 환대해주셨다.

행사를 위해 담근 전통주라기에 술을 즐기는 남편 생각에 한병 살 요량으로 의중을 물었더니 한통 그냥 다 가져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긴가민가하면서도 용기없어 망설이는 데 일행 중 화통한 친구가 한 말들이 술통을 짊어지고 나오는 통에 모두들 침묵으로 동조하여 술 한 말이 생겼다.

그 어르신이 술김에 부린 객기인지 알 수 없으나 여행길에 만난 대보름 넉넉한 인심에 내내 마음이 훈훈하다.

정월 대보름날 이른 아침에 아침 식사를 하기 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하여 이명주(耳明酒)라 불리기도 하는 귀밝이술은 귀가 밝아질 뿐만 아니라 1년 동안 좋은 소식을 들으며 잡귀를 쫓는다 한다. 세월이 흘러도 꿋꿋하게 전통을 지켜가는 분들 덕분에 좋은 귀밝이술을 얻었으니 올 한해 말귀가 환하게 틜 듯하다.

술 한 잔을 앞에 두고 그동안 내 고집에 흘려버리고 잃어버린 말들을 생각한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듯 진심어린 말들은 내 귀에 들어오지 못하고 길을 잃었을 게다.

지난해 사자성어인 엄이도종(掩耳盜鐘)을 마음에 새기며 보름달처럼 풍성한 인심을 나누어주신 거북이 마을 어른들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요동치는 정치판에도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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