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모자를 뜨는 중
지금은 모자를 뜨는 중
  • 강희진 <한국문인협회 음성군지부장>
  • 승인 2012.01.16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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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강희진 <한국문인협회 음성군지부장>

겨울이 되면 불현듯 뜨개질을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어릴 적 겨울이 되면 동네 여자애들은 사랑방에 모여 뜨개질을 하는 게 일이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언니들은 늘 뜨개질 바구니를 끼고 살았다.

언니들이 뜨개질할 때마다 나는 모델이 됐다. 조끼든 원피스든 뜨기만 하면 내가 입어 봐야 했다. 잘못 떠서 목이 적은 옷을 입고 벗을 때는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피부 알레르기까지 있어 좋지는 않은데도 언니들 때문에 입고 다닌 적이 꽤 많았다.

옷이 완성될 때마다 시험 대상이 되어 온 만큼 겨울이면 내 옷은 색깔이 하나씩 더해졌다. 지난해 입었던 옷이 작으면 풀어서 다시 떴고 해마다 색깔 하나씩이 더해져 무지개 옷이 되었다. 한번은 언니가 뜬 분홍색 조끼를 입고 미장원으로 머리를 자르러 갔었다. 사각형 무늬의 앞이 오픈된 옷이었다. 처음부터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언니들이 예쁘다고 하면서 강제로 입히다시피 했다. 그때는 더더욱 싫어서 나도 모르게 옷섶을 여미고 있었다.

4km 떨어진 미장원으로 걸어가는 내내 혹시 옷핀이 떨어져 있지 않나 하면서 땅바닥만 보고 걸었다. 얼마쯤 갔을까? 문득 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반가운 마음에 집어 보니 온전한 핀이 아닌 고장 난 핀이었다. 그거나마 주워 억지로 앞을 여미고 단골 미장원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자르고 있을 동안 손님으로 온 아줌마들이 예쁘다고 하면서 누가 떠 줬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자신감이 생겨 슬그머니 앞섶의 고장 난 핀을 뺐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언제부턴가 나도 뜨개질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었다. 잘 뜨는 것은 아니고 아이들 목도리를 색깔별로 떠주기도 하고 뜨개방을 들락거리며 스웨터를 떠 입기도 했다. 뜨다 보면 먼지가 나고 불편한 것도 있지만 잘못 뜨면 그 자리만큼 풀어서 다시 뜨는 것 때문에 부담이 별로 없다. 실제 살아온 게 잘못되었다고 그만큼 다시 풀어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으랴만 뜨개질을 하다 보면 지나간 내 과거의 어느 부분부터 풀어서 다시 뜨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때도 있다.

실 뭉치에서 실이 술술 풀려나가는 것을 보면 내 삶도 엉키지 않고 풀리기를 기도하기도 한다. 그보다 얽힐 때가 있다 해도 실마리만 잘 풀리면 그다음부터 한동안 수월하게 풀리는 걸 본다. 연속으로 잘 풀어지기보다는 중간 중간 제동이 걸리면서 한동안 잘 풀리는 것도 하나의 리듬으로 보였다.

뜨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고 평온해지기도 한다. 내가 뜨고 있는 뜨개감이 쑥쑥 늘어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 성취감에 가슴이 뿌듯해질 때가 많다. 그 위에 떠주는 사람을 생각하며 완성될 때까지 그 사람을 생각할 수 있어 행복감이 배가 된다. 그러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들은 뜨개질을 즐겼고 뜨개질하는 여자들의 그림은 하나같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게 아니었을까.

지금 나는 모자를 뜨고 있다. 세이브더 칠드런의 사업 일환으로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모자 씌워주는 사업에 동참중이다.

아프리카는 일교차가 심해 신생아의 사망률이 높다. 그런데 모자 하나만 씌워 놓으면 체온이 2도가 올라 신생아가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다섯개를 뜨는 것이 목표인데 3개째 뜨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쉽게 뜨는 모자에 도전했는데 지금은 예쁘게 뜨고 싶은 욕심에 여기저기 사이트를 기웃거려 거기서 배운 대로 무늬를 넣어보기도 하고 배색을 해보기도 한다.

뜨는 동안 얼굴도 모르는 아이에게 건강하게 자라라는 염원을 담다 보면 더 예쁘고 귀엽게 떠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썩 예쁘게 뜨지는 못한다 해도 나의 그런 마음이 가닥마다 깃들면 아이의 체온이 더 따스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른 사업체에도 조금씩 기부를 하고 있지만 모자 뜨는 일만큼 내개 행복감을 주는 일은 별로 없었다. 12월에 뜨기 시작했으니 모자를 뜨면서 연말과 연초를 보내는 폭이다. 봉사를 한다는 생각보다는 스스로 느끼는 만족감이 훨씬 크다. 왠지 올해는 뜨개실 뭉치처럼 모든 게 술술 풀릴 것 같다. 생각보다 풀리지 않는다 해도 꼬인 부분부터 다시 풀고 시작하면 될 듯한 자신감과 평온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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