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과 감사
다행과 감사
  • 이근형 <포도원교회 담임목사>
  • 승인 2011.12.05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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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이근형 <포도원교회 담임목사>

보통의 사람들에게 어떤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려 하다가 그것을 피하게 되거나 축소되는 일이 생길 때 그것을 '다행'이라고 표현한다. 일테면, 건강검진을 받던 중에 우연히 중병을 발견하게 되어 그것을 조기에 예방했을 때, 또는 긴급히 막아야 할 부채가 있는데 누군가의 도움으로 해결됐을 때 등등 그런 경우는 많다.

필자의 경우도 그랬다. 충주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딸의 등교를 분주하게 도와줘야 할 일이 생겼다. 그래서 이웃의 마트다, 우체국이다, 동사무소다를 이리저리 다니며, 시간을 쓰고 있을 때, 불현듯 떠오른 생각, "아, 오늘 오전 중에 충청타임즈에 종교칼럼을 보내야지?"였다. 그래서 딸아이의 심부름을 마치자마자 구상하고 있던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자판기 앞에 앉게 되었다. 사실 칼럼을 쓸 일은 어제까지 구상하고 쓰려고 생각하고 있기는 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기상과 동시에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오늘 오전에는 한가롭게 딸을 충주에 데려다 주고 적당한 낚시터를 찾아 휴식을 하고 오리라는 사치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만약에 딸아이가 갑작스러운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칼럼을 담당한 기자님께 큰 염려를 끼쳤을 수 있지 않았을까를 생각하니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이게 다행스러운 일인가? 다행이라는 말은 행운이 많다는 뜻인데, 행운이란 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일치가 가져오는 것이다. 우연이란 어떤 행위의 주체가 없다. 즉, 그 행위가 일어나도록 신의 개입도 인간의 노력도 없이 그냥 일어난 일인데 그것이 때 맞춰 인간에게 좋게 작용된 경우를 '다행'이라고 하지 않은가. 거기에는 그냥 좋은 느낌만 있을 뿐 표현할 대상이 없다. 인간의 일에 우연이 있는가? 우연처럼 보이지만 모든 일에는 행위의 주체와 객체가 다 있게 마련이다. 그 행위의 주체가 인간이든 신이든 다만 인간이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볼 때 다행이라는 말을 써야 할 상황이 있었다면 당연히 감사를 사용함이 옳다. '다행'이 아니고 '감사'인 것이다.

실제로 한번 실험을 해 보라. "어제 교통사고를 당할 뻔했는데 무사했다. 참 다행이다.", "중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것을 발견하여 치료했으니 참 다행이다." 여기서 다행 대신에 감사를 넣게 되면 얼마나 가슴이 따뜻해 오는가? 필자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지난 10월 추수감사주일을 지켰다. 90세의 노인 한 분이 농사 지은 산물 중에 먹음직스럽게 익은 호박이며 채소들을 제단 위에 제물로 가져 오셨다. 또 여러 성도들이 이런저런 과실과 채소를 보기만 해도 흐뭇한 모양새로 제단의 제물로 드렸다. 그것은 과일이 아니라 마음이 아니었을까? 자신들이 비록 농사를 짓는 농부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매일 먹고 사는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알게 모르게 주관하시는 절대자 그분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었으리라. 추수감사 축제 예배를 마친 후 중·고등학생들이 최근 유행하는 TV코미디 개그콘서트의 '감사합니다'라는 코너를 패러디한 촌극을 보여주었다. "감사합니다~~ 예배시간에 헌금시간에 돈이 없어서 쩔쩔매는데 성경책 속에 지난 주일에 끼워놨던 게 발견되어서 감사합니다~~" 성도들이 폭소를 터트리는 순간이었다. 교회의 감사헌금제도를 비판하는 분들이 혹 있다. 한국교회에 수십 가지의 감사헌금 봉투가 있어서 뭔가 잘못된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만약 인간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들이 수십 가지 정도만 있다면 우리네 삶은 얼마나 힘겨울까?

오늘도 나는 감사하다. 나에게 귀찮은 심부름을 시켜준 딸이 있어서 감사하다. 칼럼을 써 달라는 신문사가 있어서 감사하고, 나를 힘겹도록 의지하는 성도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글을 쓰기 위한 컴퓨터가 있어서 감사하고, 글을 쓰고 나면 훌훌 털고 일어나 달려갈 쉼의 장소가 있어서 감사하다. 이 모든 것이 다행이 아니라 감사로 이어져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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