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경제정의 
우울한 경제정의 
  • 권혁두 국장<영동>
  • 승인 2011.11.0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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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요즘 사정이 조금 나아졌는지 모르겠다. 파키스탄 등 후진국에서 수제 축구공을 만드는 어린이들의 고달픈 인생 말이다. 90년대 중반 이들의 참상이 드러나며 국제사회가 분노했고, 나이키와 아디다스 등 다국적 스포츠사들은 아동 학대와 착취 혐의를 뒤집어쓰고 뭇매를 맞았다.

손으로 축구공 하나를 만들려면 육각형 가죽 32장을 한 땀 한 땀 1620번이나 꿰매야 한다. 이 고된 수작업에 초등학교 갈 나이의 어린이들이 동원되고, 서너 시간 동안 쪼그리고 앉아 공 한 개를 만들면 150원을 받는다고 했다. 쉴틈없는 손작업에 지문은 없어지고, 접착제의 독성에 감염돼 시력을 잃는 어린이들도 속출했다.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나며 FIFA까지 나서 거대 스포츠사들을 압박했다.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은 어린이들은 학교로 보내고, 그들이 일하던 자리를 부모가 맡아 적정한 임금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개된 상황은 딴판이었다. 90년대 초부터 아동노동과 관련해 구설에 오르던 ‘나이키’는 소비자들이 불매운동에 나서고 주가 하락사태까지 겹치자, 지난 2006년 축구공을 납품받던 파키스탄 최대 스포츠사 사가와 계약을 종료했다. 이 회사에서 일하던 노동자 4만5000명은 졸지에 ‘대규모 감원’이라는 날벼락을 맞았다. 어린이들은 축구화를 제작하는 중노동에서는 벗어났지만 더 열악한 사업장을 전전해야 했다. 국제사회가 추구한 정의는 이들에게 더 참혹한 시련을 가져다 준 재앙이 돼 버렸다.

사가스포츠사가 위치한 ‘시알코트’는 연간 2000만 개 이상의 축구공을 수출하는, 그야말로 축구공으로 먹고 사는 도시다. 전 세계 수제 축구공의 70% 이상을 공급하는 파키스탄에선 전국적으로 30만 명의 노동자가 축구산업에 종사한다. 급료와 노동환경이 최악일지언정, 이들을 먹여 살리는 젖줄은 축구공인 셈이다. 파키스탄이 국제사회가 자국 어린이들에게 보내준 선의와 관심을 환영했을 리 없다.

국내 1, 2위 대부업체인 러시앤캐시와 산와머니가 계열사들과 함께 최장 6개월 영업정지 처분을 받을 모양이다. 법정 이자 상한선보다 높은 이자를 받다가 적발됐다. 현행 법정 이자율 상한선은 39%이지만 계약을 갱신하는 고객들에게 종전대로 44%를 받다가 들통이 났다는 것이다. 궁지로 내몰린 영세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고리대금업체의 불법영업에 철퇴를 내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후유증이 우려되고 있다. 전체 대부업체 이용자의 절반 가까이가 두 업체 이용자라고 한다. 영업이 중단되면 이곳을 이용하던 서민들 상당수가 살인적 금리의 불법 사채시장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경제정의 추구가 오히려 보호하고자 하는 대상을 위기로 몰아넣은 파키스탄의 축구공과 닮은꼴이다.

그러나 정부가 고민해야 할 대목은 법을 위반한 대부업체 징벌로 초래될 서민들의 피해 방지책이 아니다. 금리가 40%에 육박하는 급전으로 생계자금을 조달하는 영세민이 250만명을 넘고, 대출금액도 7조5000억원에 달한다는 차가운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언제 터질지 모를 가공할 파괴력의 시한폭탄을 안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가계부채는 이미 올해 들어 사상 최초로 800조원을 돌파했다. 대출금 상환부담 증가→ 소비와 투자 위축→ 실업증가와 소득감소→ 가계부채 증가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양상이다. 그래도 외환위기 때는 가계부문이 상대적으로 건실해 위기탈출을 위한 공적자금 조성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가계부채가 도화선이 돼 금융위기가 터지는 경우 경제는 버팀목을 잃고 재기불능의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시장 불공정 개선 노력도 지엽적 현상에만 집착해선 성과를 일굴 수 없다. 빈곤은 구조적이고 세습화한 반면 복지는 밑바닥인 상황에서 축구공을 기우던 어린이들이 학교로 돌아갔을 리 없다. 서민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고작 대부업체의 반칙을 잡아내고 요란하게 휘슬을 울리는 정부의 모습은 한편으로 딱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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