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은 법(法)과 스토리텔링
최고은 법(法)과 스토리텔링
  • 정규호 부국장 <보은·옥천>
  • 승인 2011.11.03 18: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정말이지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길거리를 함부로 나뒹구는 낙엽을 보면서, 또 고개를 들어보면 벌써 앙상해진 나뭇가지로 인해 가을의 스산함이 내 몸과 마음에 스멀스멀 기어들면서 해마다 되풀이되는 가을 타는 쓸쓸함만을 탓하고 있을 뿐. 그녀를 잊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난 2월 어느 날, 지금 이 난에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최고은의 서러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은 사이, 나도 모르게 그녀를, 그리고 굶주린 배를 부둥켜안으며 세상과 작별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사회의 비정함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한 구석에 조그맣게 실린 예술인 복지법안이라는 이른바 최고은 법의 국회통과 소식을 접하고서야 세상일의 무상함과 함께 결국 나 역시도 이처럼 지독하게 몰인정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나는 지난 2004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전국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공모전을 기획·시행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스토리텔링이라는 용어 자체마저 생소한 시기여서, 이야기 소재를 찾는데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을 들여야 하는 까닭조차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바야흐로 장삼이사, 도시의 미래를 생각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야기산업의 시대를 말하지 않는 이를 찾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경천동지할 만큼 변한 것도 아닌데 최고은, 그녀의 서러운 죽음을 새삼 떠올리게 되는 지금은 차라리 괴롭기도 합니다.

국회에서 통과된 예술인복지법안은 이제 문화체육관광부가 시행령 마련에 들어가면서 예술인에 대한 범위의 설정을 비롯해 예술인들의 권익과 고용, 창작을 돕는 한국예술인 복지재단 설립을 위한 추진위원회 구성 등 일련의 후속조치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문제는 최고은이라는 젊디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로 인해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사회와 정치권이 허겁지겁 예술인의 열악함을 깨닫고 대책을 세우고 있는 상황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억대의 출연료를 받는 정상급 대중스타와 그보다는 못 미치는 연출자, 그리고 여전히 허섭스럽기 그지없는 대우를 참아내야만 하는 스태프들의 불공정함을 구태여 거론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예술인에 대한 복지대책이 서둘러 마련되고 있음에도 작가 등의 지적 노동에 대한 가치 기준은 여전히 모호하고, 대다수의 예술인들이 소위 경제 질서 중심의 노동과 고용구조와는 별개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일임은 분명합니다.

2009년을 기준으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인 종사자는 18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월평균 수입이 없는 경우가 37.4%에 달하며, 이를 포함해 그나마 100만원 이하 월급을 받는 예술인은 63%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예술인의 경제적 여건과 사회안전망이 이처럼 매우 취약한 실정일진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바탕으로 창조적 열정을 불태우기를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닐까요.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스토리텔링공모전은 이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뒤이어 이를 뒤따르는 유사 공모전이 수없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산업의 중요성이 이토록 강조되고 있음에도 그 원형질이 튼실한 뼈대와 근육질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음은 차라리 안타깝습니다.

그런 허약한 토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슴 아프고 배고픈 현실을 참아내며 위대한 작가가 되리라는 희망을 접지 못하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의 열정은 차라리 나를 더욱 비참하게 하고.

까맣게 잊고 있던 내 몰인정함에 치를 떨 수밖에 없는 11월 초입. 세상의 모든 활엽수들은 지상으로 잎을 내려 보내는데... 나는 최고은, 그녀의 숭고한 이름을 밀알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키는 치졸함으로 속죄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