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불의
정의와 불의
  • 김태종 <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1.10.3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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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말이라는 것, 참 오묘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한때 이것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정의와 불의의 문제, 불의에 맞서 싸우며 정의를 살려 세우는 것이 사람으로 태어나 목숨을 걸어 볼 만한 일이 아니겠느냐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불의를 밥먹듯 저지르는 사람일수록 정의라는 말을 많이 쓴다는 것을 보았고, 참으로 정의로운 사람은 자신이 정의로운 줄도 모른다는 생각도 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정의라는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이 그만큼 그 시대가 불의로 들끓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정의와 불의를 말해야 하는 시대를 건너가고 있고, 세상을 살 만큼 살면서 온갖 것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한 지금 와서 다시 살피면 불의는 현실이고 정의는 희망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도 듭니다. 세상의 주류는 아직도 불의라고 할 만한 상황이 거듭되고 있는 까닭입니다.

불만 가득한 중얼거림 같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정의와 불의의 경계를 찾아보려는 하나의 물음입니다. 사실 이 둘 사이의 경계에 무엇이 있는지를 못 본다면 이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정의를 세운다는 몸짓이 몹시 위험해진다는 것도 우리네 삶의 한복판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것을 모를 이가 없을 것입니다.

정의와 불의의 문제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이라는 것, 그것이 정의와 불의의 경계선이라는 것, 자신의 이익 때문에 남에게 부당한 짓을 하는 것이 불의이고, 그것이 틀림없는 이익이라 하더라도 차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불의와 대립하는 것이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것이 부질없는 환상일 수도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불의나 정의는 각각의 상황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선택하게 되는 삶이나 행동의 한 양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경우에는 누구는 정의롭고 어떤 사람은 불의하다는 식의 도식화는 처음부터 가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집단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불의를 선택한 집단이 아무리 어느 한 행동에서 의로운 모습을 보인다 해도 그것으로 정의로워질 수는 없으며, 그런 일도 거의 없이 단지 이해의 관계를 따라 움직이는 속성을 지니는 것이 보통의 수순입니다. 그런 집단이 주도권을 쥔 사회나 시대를 비극의 광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은 그렇기 때문에 정의나 불의라는 것이 제도나 관습, 또는 일반화된 어떤 틀로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행법에서의 불법이거나 범법이 정의일 수도 있고, 다수가 그렇다고 여기는 상식을 깨뜨리는 행위가 정의일 수도 있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얼마든지 그 사례를 찾을 수 있고, 현실에서도 그와 같은 일은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니라고 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정의나 불의가 주관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재미있는 일이라고 한 건데, 어느 사안에 대한 판단이나 대응양식에 대한 객관적 입장이 바로 정의나 불의라는 것의 실체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정의로운 판단이나 행위는 있을 수 있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보지만 정의를 위해 불의와 맞선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로 다시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정의는 소중하고 아름답지만 불의를 없애기 위한 싸움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음, 하여 사람구실을 하며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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