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 그리고 10·26 선거
목마와 숙녀, 그리고 10·26 선거
  • 정규호 부국장<보은·옥천>
  • 승인 2011.10.27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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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한밤중에, 그것도 TV를 통해 10·26 재·보궐선거 개표 방송을 보다가 뜬금없이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가 읊어지는 까닭은 무얼까.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되는 시 ‘목마와 숙녀’는 흘러간 가수 박인희의 애잔한 낭송으로 지금도 여전히 내 귓가에 남아 있다.

만약 이 글이 여기에서 멈춘다면 ‘보수의 얼짱 대변인’이거나 ‘선거의 여왕’에 대한 애달픔쯤으로 여겨질 수 있으리라.

그리고 계속되는 개표 방송. 방송은 서서히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고, 그런 능수능란한 순간 대처는 아침 신문에 완벽하게 전이되면서 ‘앵그리 영맨, 정치판을 탄핵하다’거나 ‘젊은 분노, 한국정치 점령하다’, ‘시민운동가에 거대 여당 침몰’ 등의 선정적 찬양으로 이어진다.

어디 그뿐인가. ‘정당정치, 쓰나미 덮치다’라는 표현에 이어 심지어는 정치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식의 단정적인 결론도 서슴지 않는다.

다시 시인은, 수려한 외모와 모더니즘에 대한 질긴 연민의 시인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를 통해 노래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거나 ‘술병에서 별이 떨어지고/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고.

애초부터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집권여당은 날선 결기로 대중을 시퍼렇게 만들고, 거기에 당당하게 맞설 제1야당은 ‘시민운동’이라는 이름에 속절없이 굴복하고 만 서울시장 선거판은 그러나 어찌 보면 가장 ‘시민스러움’이었으니.

차라리 그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환치된 지극히 정상의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는 시인의 절창은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라는 노래로 스스럼없이 스며든다.

서울시장 선거는 정당정치의 실종이거나, 1년여 앞에 치러질 대선에의 지각변동으로 요란스럽게 치장되고 있으며, 그 격랑 속에는 ‘시민’이라는 존엄한 이름에서도 고스란히 ‘서울’이라는 특별함은 남아 있다.

때문에 ‘민심이 등을 돌렸다’는 식의 선정적인 선동에 현혹됨은 적어도 ‘시민’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여전히 경계해야 마땅할 일이다.

따지고 보면 이번 선거에서 가장 쓰라린 상처를 입은 쪽은 민주당일 것이다. 서울은 ‘시민’에 점령당했고, 나머지 지방에서는 당연시되는 호남만 겨우 건졌을 뿐이니 어차피 대립구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한나라당보다도 민주당의 입지는 더 좁아진 셈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시인의, 그 ‘목마와 숙녀’의 한탄에 머물 수 없는 것이 민주당의 현실이 아닌가.

하여 시인은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고 조언하는 듯하다.

오죽하면 시인 박인환은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낡은)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라고 읊조리기까지 했을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음 싶다. 시민은 시민대로, 정치인들은 또 그들대로, 제발 살뜰하게 세상과 사람을 보살피며 각자가 넉넉하게 제 할 일을 찾아 누구든 세상에서 실종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번처럼, 그리고 어쩌면 이번보다 더 엄중하게 시민의 권리를 행사하면서 당당한 참여에 아낌이 없어야 할 것이다.

하마 먼동이 트고 있다.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목마’는 어디에 숨어 있고 ‘숙녀’는 또 누구를 기다려야 하나. ‘오늘 밤에도 별은 바람에 스치운다’<윤동주의 서시 끝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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