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사회
학벌사회
  • 오창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11.10.26 17: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요즘 학부모 사이에서 명문대에 가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정보력, 아버지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유행이다. 이래라저래라 훈수 드는 아버지의 모습은 시대에 뒤떨어진 고집으로 비친 지 오래고, 할아버지의 재력까지 동원해야 할 만큼 사교육비 상승은 가파르다. 명문대 진학을 위해선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대졸자들이 취업을 못해 고시원을 전전하는 모습과 학벌 과잉이라는 말이 떠돌아도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명문대라는 간판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훌륭한 카드가 된다.

서울시장 자리를 놓고 나경원 후보와 박원순 후보 간의 열띤 선거전이 있었다. 늘 그렇듯 학력은 선거의 중요한 이슈가 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박원순 후보의 학력 가운데 ‘서울대 문리대 제적을, 서울대 사회계열 제명’으로 선거 당일 전 투표구에 정정 공고를 냈다. 이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목적보다는 서울대 출신이라는 학력을 의심한 여당 국회의원의 의혹 제기에서 출발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학력과 학벌이 후보자를 결정하는 판단기준에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서울시장뿐만 아니라 웬만한 선거에 나온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화려한 학력에 일반인은 주눅이 든다. 명문대 출신이 아니면 정치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것처럼 비친다.

지난해 고려대생 김예슬이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대학 교육을 거부한다’ 라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이고 대학을 자퇴했다. 친구를 적으로 여기며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결국 긴 트랙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격증과 취업이라는 수많은 관문을 넘어야 하는 상황 속에 자신은 늘 ‘상품’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자괴감이 자퇴라는 결정을 내리게 했다. 얼마 전에는 “서울대라는 간판의 힘을 알게 되면서 학벌과 경쟁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더욱 깊어졌습니다”라는 대자보를 쓰고 서울대 사회학과 학생이 대학을 자퇴했다. 대학의 서열 체제와 입시경쟁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퇴의 이유라고 그는 밝혔다. 청소년인권운동 과정에서 서울대생이라는 이유로 받은 무언의 혜택이 그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면 학벌의 혜택은 더욱 커질 것을 그는 걱정했다.

그런데 스스로 삶의 결정권을 가진 두 사람이 대학을 자퇴하는 이유가 충분히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맞지만, 만약 이들이 명문대생이 아니라면 이처럼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과중한 등록금과 생활비 마련을 위해 학교를 떠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수많은 변은 이슈화되지 못한다. 이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학벌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학력보다는 능력을 강조한다는 말이 위정자의 입에서 나오지만,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우리 사회는 보이지 않는 학벌의 신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25일 서울교육연수원에서 열린 IP-MEISTER(마이스터) 아이디어 발표회를 참관한 뒤 “고졸이면서 사회에 진출한 사람을 대통령 직속 위원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사교육을 부추기고 명문대생이 아닌 학생들에게 이류, 삼류의 낙인을 찍는 현 대학제도의 문제는 과감한 교육개혁 없이는 요원하다. 학력이 신분이 되는 사회의식이 개혁되지 않는다면 미봉책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부모의 재산이 자식의 교육에도 영향을 미쳐 학벌도 세습되는 기현상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지역대학의 특성화를 통해 인재들이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현상을 막아야 한다. 좁은 문에 들어가지 못한 다수를 패배자로 매도하는 현실은 분명히 개선되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