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 36 >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 36 >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6.14 17: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략결혼의 제물이 된 당나라의 恨 많은 여인들
한편, 현종과 헤어진 황태자는 장수들을 이끌고 북상하여 영무(靈武)에서 군대의 추대를 받아 756년 여름 황제에 즉위했다. 새 황제인 숙종은 카라발기순의 위그르 궁정에 사절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757년 7월 카간의 장남이 지휘하는 4000명의 위그르 군대가 도착했다. 이 무렵 반란군에도 내분이 일어나 안록산이 살해되는 등 혼란이 일었다.

그해 말 위그르 군대는 장안을 탈환하고 그 대가로 장안을 약탈할 권리를 황제에게 요구했지만 낙양마저 탈환한 뒤에야 허락을 했다.

위그르 군대는 약탈할 권리를 행사하여 사흘 동안 낙양은 소름 끼치는 만행의 무대가 되었다. 위그르 병사들은 수많은 낙양의 여자를 능욕하고 살해했다. 많은 것이 파괴되었고 막대한 재물이 낙타에 실려 낙양에서 카라발기순으로 운반되었다.

원군을 보내준 대가로 위그르는 견마교역(絹馬交易) 시장을 국경에 세우라고 요구했다. 위그르는 정기적으로 수천 마리의 조랑말을 몰고 와서 한 마리당 비단 40필이라는 고정가격으로 당에 팔았다.

당시에 조랑말 한 마리당 비단 한 필 정도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중국 사가들은 이 조랑말이 위그르가 당나라 조정에 바친 공물이라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사실은 위그르의 군사원조에 대해 당이 치른 대가였다. 위그르는 이 거래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얻었다.

위그르 카간은 낙양에 머무는 동안 사마르칸트에서 온 마니교 사제단을 만나 개종하였다. 카간은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이 새로운 종교를 왕국에 널리 보급하라고 명령했다. 실크로드에서 마니교는 전성기를 맞이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안록산의 난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당나라는 위그르와 굴욕적인 외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티베트가 세력을 확장하자 위그르와 공동 대처하는 등 대내외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Susan Whitfield의 “Life Along the Silk Road"를 통해서 그 당시 당나라의 사정을 떠올려 본다

821년 가을 당나라 황제 목종(穆宗)의 누이 태화(太和)공주는 위그르와 당의 우호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볼모로 선택되어 위그르의 카간과 결혼하러 가게 되었다.

공주는 장안을 떠나기 전에 호선무를 새로 배웠는데 이 춤은 소그디아나 여인들이 진홍색과 초록색 옷을 입고 작은 원형 깔개 위에서 빙글빙글 맴돌며 추는 춤이었다. 공주는 쿠차의 음악을 특히 좋아해서 카간의 궁전에서도 금을 상감한 현악기를 켜면서 쿠차 음악을 계속 즐기고 싶었다.

서역 음악은 당나라의 도시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고 황궁에는 외국 악단이 여럿 상주해 있었다.

당시 위그르는 말 한마리에 비단 40필, 심지어 50필까지를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위그르는 그 가격에 말을 사지 않으면 쳐들어가겠다고 은근히 협박까지 했다. 733년에 위그르가 말 1만 마리 값으로 요구한 액수가 당의 연간 세입을 넘어서자 황제는 위그르의 부당한 요구를 달래려고 애쓰는 한편 백성의 고통을 늘려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고 6000 마리만 사들였다.

하지만 위그르는 정기적으로 수만 마리에 이르는 말떼를 보내 당의 국고를 고갈시키고 있었다.

태화공주는 위그르 카간에게 시집가는 네 번째 당의 공주였다. 카간에게 맨 처음 시집간 공주는 태화의 선조 할머니였다.

이 공주는 안록산의 난 때 위그르가 당나라를 도와준 뒤인 758년에 카간에게 보내졌는데 그때까지 벌써 두 번이나 남편을 여윈 과부였고, 나이도 젊지 않았다. 그리고 위그르로 시집간 지 불과 1년 만에 세 번째로 과부가 되어 당으로 돌아왔다. 그녀와 함께 갔던 동생은 위그르에 남아 다음 카간과 결혼했다. 이 공주는 790년 카라발기순에서 죽었다.

2년 뒤 중국황실은 위그르의 군사적 지원을 얻어 티베트와 맞서기 위해 태화의 종조모인 양목(襄穆) 공주를 서둘러 위그르로 보냈다. 양목 공주는 808년 죽을 때까지 위그르에 머물면서 세 명의 카간과 차례로 결혼했다.

위그르가 또다시 공주를 보내 달라고 요구하자 7년 동안 시간을 끌다가 결국 820년 태화의 언니인 영안(永安) 공주를 현 카간의 선대 카간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했다.

이 카간은 영안 공주가 장안을 떠나기 전에 죽었다. 얼마 후 영안공주는 장차 또 다른 정략결혼의 제물이 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 도사(道士)가 되는 길을 택했다. 8세기 초에 금선(金仙)과 옥진(玉眞) 공주 자매도 앞서 이 길을 걸었다. 그후 태화 공주의 두 조카를 포함하여 15명의 공주가 도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태화 공주의 운명은 여행을 떠나기 불과 한 달 전에 결정되었다. 거의 600명에 이르는 위그르인이 영안 공주를 데려가려고 장안에 들어올 때였다. 결국 영안 대신 태화를 보내기로 결정되었고, 황제의 결정을 위그르 사절단에 알리기 위해 대신이 파견되었다.

중국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군사력만이 아니라 외교와 뇌물을 이용했다. 공주를 시집보내는 것은 이런 정책의 일환이었다. 공주를 보내 동맹관계를 다지는 정책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시작되었다. 현재의 왕조가 수립된 뒤에도 20명이 넘는 공주가 외국으로 보내졌다.

태화 공주의 남편은 결혼한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새 카간이 등극했다. 위그르는 카간과 맨 처음 결혼한 당의 공주는 남편이 죽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남편과 나란히 묻혀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 죽기 싫으면 칼로 얼굴에 상처를 내야한다는 요구는 받아들였다. 이것은 위그르의 전통적인 애도 표시였다. 태화 공주는 순사(殉死)하지도 않았고 위그르를 떠나지도 않았다.

832년 카간과 많은 대신들이 암살당한 뒤 새 카간이 왕위에 올랐다. 이 무렵 위그르는 국운이 심각하게 기울고 궁정은 분열되었다. 위그르와 충돌했던 키르기스 군대가 자주 위그르를 침략했다.

839년에 카간이 두 대신을 반역죄로 처형하고 그들 지지자들이 그 보복으로 카간을 살해하면서 카라발기순에 위기가 발생했다. 840년에 키르기스 군대가 위그르 수도를 점령하고 새 카간을 죽이고 도시에 불을 질렀다.

백성들은 남쪽으로 달아났고 태화 공주도 같은 운명이었다. 태화 공주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고국 땅으로 향했다. 결국 10만 명에 달하는 위그르는 당나라 국경근처에 임시로 머물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843년 봄 당나라 원정군대가 위그르 난민촌을 기습했다. 위그르인들은 쫓긴 끝에 훗날 위그르인 학살 언덕이라고 부르게 된 곳에서 수천 명이 살해 되었다. 많은 수는 항복했고 일부는 달아났다.

카간도 몇 년 뒤 고비사막으로 끝까지 추적해 온 당나라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중국 북부에 아직 남아 있던 위그르인들은 그 후 몇 세대를 거치는 동안 중국에 동화되었다.

태화 공주는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843년 늦봄 장안에 도착했다. 당 황제는 대신들을 소집하여 태화 공주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의논했다.

위그르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환궁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황제는 태화 공주를 비호했다. “나는 태화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때가 많았다. 이역만리에서 얼마나 고국을 그리워했겠는가”결국 태화 공주의 귀국을 환영하기로 결정되었고, 그녀의 머나먼 이국생활은 끝나게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