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의 선물
가을날의 선물
  • 정상옥 <수필가>
  • 승인 2011.10.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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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몇 년 전 아버지가 떠나신 이후로는 모자점에 들를 일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마음이 쓸쓸하거나 속이 빈 듯 헛헛해질 때면 모자점에 들르곤 했었다. 한참을 정성들여 고른 모자 한 개를 예쁘게 포장하여 상점을 나설 때의 뿌듯함과 기뻐하실 아버지의 표정을 상상하는 즐거움은 내 빈 가슴을 언제고 행복으로 꽉 채워주곤 했었다. 오랜만에 그곳을 지나는데 상점 안에서 내 또래의 한 여인이 다양한 모양들의 모자를 이것저것 고르며 연신 싱글벙글하는 얼굴빛이 마치 꽃이 환하게 핀 듯싶었다. 몇 년 전에 아버지 선물을 고를 때마다 가슴 뿌듯해 하던 내 모습인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싸하니 저려 왔다.

저 사람은 누구를 위해 온 정성을 다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일까. 지금은 먼 기억이 되어 꺼내 추억하는 것조차 서글퍼지는 상념 앞에서 다시 뵐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울컥 사무쳐 와 눈두덩이 갑자기 뜨끈해져 얼른 고개를 돌렸다.

거리는 어제 잠깐 내린 비 때문인지 온통 낙엽천지다. 발끝으로 차이는 낙엽을 한 장 집어 들고 보니 참으로 곱다. 황금빛과 다홍빛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고운 단풍을 버리기 아까워 책갈피에 꽂았다. 이 고운 낙엽이 곱게 말려지는 날, 내 마음을 담은 편지 한 장과 함께 누군가에게 선물하리라. 하나, 낙엽 한 장을 선물로 생각하며 감사하게 받아 줄 사람이 내 인연의 고리 안에 몇 명이나 있을까. 너나 할 것 없이 값비싸고 화려한 세상의 물질에 흠뻑 젖어 그 진가마저 저울질하며 사는 풍요한 삶 속에 이까짓 낙엽 한 장이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스산한 가을날 저녁나절 같은 쓸쓸함이 훅하고 밀려온다. 돌아보니 내 곁의 인연들이 속세의 때가 많이 묻은 것이 아니라 결국 내 마음속에서 먼저 사리사욕과 교만의 때로 더럽혀진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책갈피에 가지런히 꽂힌 낙엽들을 다시 한 번 들추다가 문득 나에게 내가 선물한다면 어떨까란 생각이 섬광처럼 스치자 이상하게도 가슴이 설레며 심장이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왜 진작 내가 나에게 선물할 생각을 못했을까. 지금까지 살면서 오롯이 나 자신에게 주려고 선물을 준비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 나만 먹기 위한 새 밥을 지으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본 적도 없고 과감하게 항공권을 끊어 본 적도 없다. 하루의 시간조차 나만을 위해 비워둔 적이 없는 것은 소심하고 못난 나 자신 탓이었거늘 누굴 탓하랴. 늘 바쁜 하루를 살았다지만 삶의 뒤안길에서 허무와 쓸쓸함을 떨칠 수 없었던 건 자존의 상실 때문이었나 보다.

선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정성과 애정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 진가는 큰 것이기에 받는 상대도 그만큼의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리라.

먼 훗날 내 생의 늦가을이 오더라도 추억할 봄날도 없이 서걱거리는 갈대의 울음처럼 무미건조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나 자신을 내가 먼저 사랑하리라. 중년의 생애는 좀은 느긋하게 옆도 뒤도 돌아보며 오랫동안 정성 들여 담가놓은 포도주향처럼 그윽하고 맛깔 나는 하루하루를 내게 먼저 선물하리.

아버지가 딸의 선물을 한 번도 마다하지 않고 흔쾌히 받으셨던 것은 주는 기쁨을 충분히 느끼며 행복하라는 부정(父情)과 배려였나 보다.

가을이 깊어가는 날, 가장 나를 잘 알고 아끼는 나에게 곱디고운 단풍 몇 장에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보낼 준비를 하는 동안 내 심장은 힘차게 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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