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 45 >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 45 >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6.14 17: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편에는 둔황 탐험대의 역사와 인물들이 소개되어 있다. 장경동 문물세계전시현황에서 눈에 띄는 인물로 왕원록도사와 영국의 오렐 스타인, 프랑스의 폴 펠리오, 스웨덴의 스벤 헤딘, 독일의 폰 르콕, 미국의 랭던 워너, 일본의 오타나 백작 등 책 속에서 많이 읽었던 인물들의 사진이 진열되어 있다.

중국이 유물 반출에 대한 금지령을 내릴 때까지 그들은 경쟁적으로 실크로드의 사라진 도시들에 대한 벽화와 필사본, 조상(彫像) 그 밖의 유물들을 톤 단위로 반출해 갔다. 이 방대한 중앙아시아 수집품은 최소 13개국의 박물관과 연구기관에 흩어져 소장되어 있다. 스타인과 헤딘은 영국인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유물발굴과 수집업적으로 영국에서 기사작위를 받을 정도로 존경과 추앙을 받았다.

1907년 3월 지친 몸을 이끌고 둔황에 도착한 영국인 스타인은 우루무치의 한 상인한테서 왕원록이란 도사가 몇 해 전 막힌 한 석굴 안에서 방대한 고문서를 발견했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지체 없이 천불동을 가 보았지만 왕도사는 사원을 복구하기 위해 공사비 모금을 하러 나가고 없었다. 중국인 조수 장을 시켜 탐문해본 결과 고사본의 수량이 적어도 몇 바리 분은 되며, 이것을 발견한 사실이 난저우(蘭州) 당국에 보고 되어서 견본을 직접 확인한 태수가 왕도사에게 그 동굴에 자물쇠를 채우고 고사본을 안전하게 보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가사이한 고대 서고의 존재에 가슴 벅차하며 장려한 벽화와 조각상들로 가득찬 석굴에 경탄해 마지않고 이 동굴 저 동굴을 돌아다니던 스타인은 우연히 절에 있는 한 젊은 승려를 만났다. 그로부터 왕도사의 소식과 고서에 대한 얘기를 전해들은 스타인은 인내를 가지고 왕도사에게 접근하여 불사를 위한 시주도 하고 현장법사를 존경하는 그의 심정을 전하면서 왕도사에게 환심을 사고 신뢰감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현장법사를 존경하고 있던 왕도사는 현장에 대한 스타인의 신뢰감과 존경심에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다. 마침내 토굴 안에 있는 비밀 수장고를 가리고 있던 벽돌 벽을 허물어버리고 원시적인 등잔불 아래서 그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작은 방안에 펼쳐진 광경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무질서하게 빼곡히 쌓여 있는 두루마리 필사본의 높이가 왕도사의 어둑한 램프 불빛 아래서 거의 3m에 달해 보였으며, 방안에 가득 차 있는 이 문서들의 부피는 나중에 측정해 본 결과 약 150입방미터에 육박했다”고 스타인은 그 때의 심경을 술회하고 있다.

다행히 난저우 당국에서 운송비를 염려한 나머지 왕도사에게 고서들을 현재의 장소에 그대로 책임지고 보관하도록 맡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왕도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치밀한 노력을 기울이며 수개 월간의 노력 끝에 필사본 24상자, 회화와 자수품 등 미술품 5상자를 단돈 130파운드에 매수하여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다.

실로 인류역사에 귀중한 고대사 자료가 헐값으로 팔려나가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 왕도사로 인해 발생하였다. 중국인들로서는 외국 약탈자들에게 분노와 적개심을 끓어오르게 하는 장면이다.

둔황 고서에 대한 두 번째로 중요한 사건은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중국 탐험대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13개 언어에 능통하고 중국어 실력은 중국인들도 놀랄 정도로 해박한 펠리오는 27세의 유명한 하노이 프랑스 극동학원 교수였다. 8개월 동안 쿠차에 머물면서 답사에서 많은 수확을 거둔 펠리오는 우루무치에 가서 머무는 동안 고사본들이 천불동 비밀동굴에서 발견됐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둔황을 방문하게 되었다.

펠리오가 둔황에 도착해 천불동을 찾았을 때 스타인 경우처럼 필사본이 있는 동굴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고 왕도사는 자리에 없었다. 며칠 뒤 둔황 읍내에서 왕을 찾아 고문서에 대해 추궁하였다. 펠리오의 중국어 실력에 기가 질린 왕도사는 마침내 필사본을 보여주겠다고 응낙했다. 스타인에 비해서는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스타인에게서 받은 기부금도 동이 나 있었고, 외국인 탐방객에게서는 스타인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다. 왕은 스타인이 자신과 맹세한 비밀 약속을 잘 지켜준 것으로 믿지 않을 수 없었고 외국인들을 신뢰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펠리오는 스타인이 이미 그 비밀 동굴을 다녀갔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였지만 3일 밖에 안 된다고 잘못 알고 위안을 삼았다. 펠리오는 천불동에 온지 한 달여 만에 그 비밀 동굴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펠리오는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어림잡아 1만5000∼2만 부는 되는 방대한 양이었다. 하나하나 펼쳐 보면서 살피려면 최소한 6개월이 걸리는 양이라고 판단한 펠리오는 서고 전체를 개략적으로나마 파악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펠리오는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반드시 손에 넣어야할 것과 원하긴 하지만 필수적이지 않는 2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그는 먼지투성이가 된 꾸러미들을 뒤지면서 길고 숨 막히는 3주간의 시간을 보냈다. 펠리오는 둔황 고서에 대한 발견이 이 지역에 너무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수장된 문서 전부를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따로 챙겨놓은 두 부류의 사본을 팔라고 설득하고 두 사람 사이의 협상은 극비리에 추진되었다.

마침내 5백 테일(약 90파운드)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수집품을 꾸린 상자가 증기선에 오른 후에야 펠리오는 그것들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펠리오는 고사본의 견본을 가지고 북경으로 향했다. 그것을 본 중국학자들은 이 엄청난 고사본에 대해 믿을 수 없어 했다. 그 결과 북경당국은 둔황의 부지사에게 즉각 전보를 쳤다. 석굴에 남아있는 어떤 것도 밖으로 못나가게 금지시키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이미 귀중한 고문서가 유출된 뒤였으니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펠리오는 중국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질적인 면에서 영국의 스타인이 가져간 고문서보다 훨씬 더 귀중한 것들을 가져갔다.

작고 왜소한 체구에 밭이랑을 매고 방금 나온 듯한 시골 아저씨 얼굴을 한 왕도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실크로드 역사에 가장 어리석은 짓을 한 왕원록은 고문서 유출자로서 길이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무자비한 수집광들이 칼질해 놓은 수많은 석굴사원의 프레스코 벽화들은 보기에도 무참한 심정이다. 화염산 천불동 계곡에서 느꼈던 그 황량하고 야만적인 약탈행위를 보고 씁쓸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투르크 무슬림들의 광신적인 문화재 파괴행위로부터 유럽의 탐험대들이 불교문화의 보존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독일의 폰 르콕 교수는 자신의 저서 ‘사막에 묻힌 중국 령 투르키스탄의 유물들’에서 지역 농민들이 밝은 색 안료를 강력한 특수 비료로 믿고 프레스코 벽화를 마구 긁어냈다고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건조한 기후에 수세기 동안 보존된 사원 유적의 대들보는 나무가 극히 부족한 이런 지역에서 땔감이나 건축 자재로 각광을 받았다. 르콕의 설명에 따르면 벽화는 무슬림들이 혐오하는 것이기 때문에 눈에 닥치는 대로 파괴를 일삼았다 한다.

벽화 속 인물의 얼굴에 난 흉측한 상처들이 모두 그런 것들이다. 우상을 철저히 배격한 이슬람교리가 실크로드 문화를 파괴하는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였다. 또한 유물약탈자들은 지역의 위조업자들을 부채질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만들어낸 어떤 위조품들은 너무나 정교해서 그 분야 최고의 동양학 학자까지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고 한다. 이슬람 아훈은 동업자와 함께 조그만 공장을 만들어 필사본 생산에 착수했고, 고문서 구입에 혈안이 된 경쟁자들이 그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위조자가 쓴 필사본이 최초로 생산되고 팔린 것은 1895년이었다. 아훈이 스타인에게 붙잡혀 털어 논 얘기에 의하면 초기에는 단단윌릭에서 출토된 진본 필사본인 초서체 브라흐미 문자를 본떴다고 했다. 실제로 그들의 기도는 완전히 성공했다. 이런 다량의 위조문서가 유럽의 주요 박물관에 수장되고 학자들은 이 미지의 문자를 해독하느라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공장은 번창했고 그들은 신임을 얻었다 한다.

스타인은 ‘사막에 묻힌 고대도시 호탄’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슬람 아훈은 자신의 책이 공급된 즉시 팔려나가는 반면에 그 책을 구입한 유럽인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문자를 읽지도 못하고 고대 서체들과 구별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재빨리 간파했다. 따라서 진본에 쓰인 문자를 모방하느라 고생할 필요도 없어진 셈이었다.

동업자들은 이렇게 해서 각자 독자적으로 미지의 문자를 개발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런 해괴한 서체가 다양하게 나올 수 있었다. 언젠가 대영박물관 수집품에 있는 텍스트들을 동양학 학자들이 분석해본 결과 날조된 서체가 한 다스 이상 된다는 판독결과가 나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