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입니다
가을입니다
  • 강희진 <수필가>
  • 승인 2011.10.17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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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가을입니다. 들판에는 황금물결이 출렁이고 결 고운 햇살과 바람이 가을 문턱을 자꾸만 서성입니다. 바람이 불면 갈대가 손�!求� 것 같고 그럴 때마다 괜히 설렙니다.

깻잎을 따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밭으로 나왔습니다. 얼마 전까지 푸르고 두툼하던 깻잎이 열매에 양분을 양보하고 결이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처음에는 제법 많이 땄습니다만 손이 자꾸 더딥니다. 깻잎은 뒷전이고 마음은 단풍 내린 산과 금물이 차오르는 들녘에 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맘때쯤이면 친정엄마는 대나무 채반에 가지랑 호박이랑 고추를 돌담 가득 널고는 했습니다. 풀섶에는 쓰르라미와 여치 소리가 어우러지고 뒷담 감나무에는 빨갛게 익은 대접감이 푸른 하늘에 수를 놓았습니다. 한참 정신을 팔다 보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하늘이 눈 가득 다가왔습니다. 고향집의 가을이 그립습니다.

나락 알맹이를 만져봅니다. 튼실한 알맹이가 느껴집니다. 여름내 장마와 태풍을 이겨낸 후 저만치 영글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소중합니다. 날씨가 좋으면 벼들도 성장만 계속할 뿐 알맹이를 익히지 못한다는군요. 우리도 난관을 이겨내야만 성숙하고 단단한 사람이 됩니다. 인간이든 식물이든 시련이 있은 후 단단해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가 봅니다.

봄에 희망으로 두근거렸다면 가을에는 마음이 아려옵니다. 따스한 봄 날씨와 함께 들뜨는 마음은 벅찬 내일을 꿈꾸지만 스산한 가을은 지난 추억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 언제였는지 모를,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한 조각을 움켜쥐고 그리워한다 해도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계절입니다.

엊그제는 중학교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자꾸만 말을 높이고 어색해 하는 내게 그 친구는 “내가 사귀자고 할 것 같으냐”며 웃었습니다. 모처럼 동창회를 갖고자 하는데 얼굴 좀 보자는 얘기였습니다. 날카롭고 강하기만 하던 그 친구의 숨결에서 세월을 느꼈습니다. 절대 남을 배려하지 않을 것 같았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진 걸 보니 우리도 깻잎처럼 결이 삭는 나이가 된 것 같았습니다.

뻣뻣하기만 했던 게 손바닥에 착착 부닐 정도로 얇아진 것처럼 내가 서 있는 들판도 그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초록으로 뒤덮였던 이삭이 초가을과 함께 연둣빛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는 겨자색으로 물들더니 마무리나 하는 듯 눈부신 황금색으로 덮였습니다. 딱딱해 보이는 감도 주황색으로 물들어 갑니다. 독이 올라 시퍼렇던 은행잎도 노랗게 결이 삭는 중입니다.

나는 지금 황금색으로 가기 전 겨잣빛의 들판 같은, 감이 막 주황색으로 물들어 가는, 은행잎과 단풍이 절정을 향해 첫걸음을 떼는 시기, 나는 지금 그런 나이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삶의 밭도 황금들판으로 일구기 위해서, 눈부신 단풍으로 선보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 들판을 보니 어렴풋하게 알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 나부끼는 동창회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그리움을 더합니다. 철부지였던 내 고향의 동무들은 얼마나 농익은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몹시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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