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50>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50>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6.1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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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풍에 부대껴 흙살 드러내며 울어라, 모래야!
다음날 오무라이스로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10시쯤 다시 밍사산으로 출발했다. 어제 날씨가 좋아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었으면 오늘 하미로 떠날 예정이었다. 둔황까지 와서 밍사산과 위에야추안을 사진으로 담아 갈 수 없다면 언제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사막 위를 달리는 작은 관광차를 타고 위에야추안으로 달렸다.

갈대가 일렁이는 호수의 물결이 아침 햇살에 눈부셨다. 모래 언덕 가에 힘차게 솟아오른 5층 누각이 오아시스의 신기루를 보여주는 듯했다. 카메라의 셔터를 기분좋게 눌렀다.

촬영을 마치고 밍사산으로 향했다. 쌍봉낙타를 탔다(60元). 딸랑대는 낙타방울 소리가 모래언덕을 걸어가고 있다. 부드러운 능선과 모래언덕 기슭을 따라 이어지는 낙타의 행렬들, 여인의 유방 같은 능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사막은 독특한 정취와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아득한 능선을 따라 걸어가는 낙타 행렬들 위를 맴도는 새털구름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고 있다. 낙타에서 내려 산정으로 올랐다. 모래가 미끄러지고 발목이 파묻혀 산을 오르는 것 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모래언덕을 오르며 사막을 걷다가 지쳐 죽어가는 이들의 심정이 실감이 난다.

밍사산이 유명해 진 것은 한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풍경도 있지만 '모래가 날려 우는 산'이라 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에는 산에서 무너져 내리는 모래소리가 영락없는 천둥소리로 들린다고 한다. 밍사산의 모래는 물기하나 없이 미세하고 가벼웠다. 또한 모래언덕에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면 휘파람 같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도 하는데 태양열에 달구어진 모래알이 서로 마찰해서 내는 소리라고 한다.

수백 년 전 어느 날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갑자기 엄청난 모래 폭풍이 일어나 양쪽 군대 모두 모래더미에 파묻혀 죽은 후부터 이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병사들의 함성소리와 신음소리가 구천을 떠돌며 내는 소리는 아닐는지.

하룻밤에 산을 만들기도 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사막의 모래 폭풍이 동서 40km와 남북 20km로 펼쳐진 둔황의 이 밍사산 만은 유독 움직이지 못하고 이 자리에서 수천 년의 세월을 버티게 만들었다니 믿기 어려운 자연 현상이다.

산정에 걸터앉아 정상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혔다. 눈 아래 굽어보이는 둔황 시내는 푸른 녹음지대가 펼쳐지고 사방으로 뻗은 관개수로망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 꽃이 피고 곡식이 풍성한 들판으로 이어지는 둔황 시가지가 사막의 신기루처럼 펼쳐진다. 부드러운 여인의 젖가슴을 수백 개 포개어 놓은 모래 산언덕들이 모이고 포개어져 사막의 신비로운 정취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생 라리슈가의 이야기()

라리슈가는 남편도 자식도 없다. 가사나 요리는 전혀 할 줄 몰랐다. 그녀가 지금껏 살았던 곳 가운데 자기 집이라고 생각한 곳은 딱 두 곳 뿐이다. 첫 번째는 할머니 집이고, 두 번째는 890년 현재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둘 다 북부 실크로드에 자리 잡고 있는 쿠차에 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라리슈가도 예능교육을 받았다. 철이 들 무렵부터 악기와 가무를 익혔는데, 일찍부터 탁월한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쿠차 비파를 전문적으로 배웠다. 쿠차 비파는 목이 구부러져 있고 현이 네 개인 현악기이다.

쿠차 음악은 사마르칸트에서 장안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 일대에서 명성이 높았다. 당시 중국 음악은 주로 쿠차 비파의 선율에 바탕을 둔 28개 선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국 황제와 귀족들 사이에서는 받침대 위에 올려놓은 작은 쿠차 북인 갈고를 치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 당나라 현종도 갈고를 즐겨 쳤다. 현종은 그 유명한 '춤추는 말'여섯 마리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황궁에 무려 3만 명의 악사와 무용수를 두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쿠차 출신이거나 쿠차식 연주가들이었다. 쿠차 악단들은 가수들과 함께 악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쿠차 가수들은 산스크리트어를 비롯한 많은 언어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악극은 대부분 인도에서 만들어졌지만 실크로드를 거치면서 새로운 요소를 흡수하고 현지 문화에 적합하도록 개작되었다. 악극은 중국에서 다시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져 오늘날까지 공연되고 있다.

쿠차 무용수들은 쿠차 악사들만큼 뛰어난 솜씨로 유명해서 쿠차 궁정은 쿠차의 최고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사절로 그들을 사마르칸트와 장안에 파견했다. 쿠차 음악은 엉덩이의 움직임과 몸짓의 변화와 표정이 풍부한 눈을 강조하는 인도 무용과 비슷했지만 남녀가 동시에 공연하는 소그디아나의 유명한 호선무(胡旋舞)인 '회오리 춤'처럼 다른 지역의 무용형태를 받아들였다.

음악과 노래와 춤은 은이나 옥처럼 사고 파는 실크로드의 상품이었다. 실크로드 연변의 모든 도시에서는 인도, 미얀마, 캄보디아, 소그디아나 등지에서 온 순회 무용단이 왕궁이나 시장에서 공연했고, 그들이 파는 상품은 실크로드의 상품목록에 흡수되었다.

성곽도시 쿠차는 카슈가르와 코초의 중간쯤 되는 북부 실크로드 연변에 자리 잡고 있다. 북쪽에는 텐산 산맥의 거대한 준령이 솟아있고 성벽 둘레는 약 10km였지만, 쿠차왕국의 영토는 동서가 480km, 남북이 320km나 되었고 금과 구리, 철, 납, 주석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다.

쿠차의 유명 인물로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중국어로 많이 번역하여 존경을 받았던 4세기의 승려 쿠마라지바도와 8세기 중엽 중국군 장수로 크게 출세한 거수한 장군도 쿠차 출신의 투르크인이었다.

라리슈가가 철들 무렵부터 쿠차는 줄곧 위그르의 지배를 받았다. 위그르 인들은 키르키스 군대의 침입을 받아 텐산산맥 너머 오르혼 강 연안에 있는 수도 카라발기순에서 남서쪽의 코초로 도망쳐왔다.

오르혼 강에서 남동쪽으로 달아나 중국 국경지역으로 들어간 병사와 난민은 843년에 중국군의 치밀한 준비와 기습으로 위그르 군대의 대부분은 섬멸되었다. 그 후 위그르 난민들은 수백, 수 천세대가 텐산산맥을 넘어 코초에 있는 난민과 합류했다. 키르키스에 나라를 빼앗긴 뒤 새 왕국 건설을 열망하던 위그르 병사들은 곧 코초와 인근 주변의 넓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다.

쿠차는 외국병사들의 주둔지로 이용되고 있었다. 가장 최근에 쿠차를 차지한 것은 티베트였고, 그 전에는 중국군 수비대가 쿠차에 주둔해 있었다. 쿠차는 중국의 4대 서역번진(西域藩鎭) 가운데 하나였다. 쿠차 왕가는 티베트나 중국에 충성을 바치면서도 금과 옥으로 장식한 호화로운 궁전에서 살며 계속 나라를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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