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가 하루빨리 돌아오기 바라면서
직지가 하루빨리 돌아오기 바라면서
  • 이규정 <소설가>
  • 승인 2011.10.03 17: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은 충북 제천이다. 충북도청이 있는 청주가 우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징병검사를 받겠다고 쫓아오는 청주가 처음이었다. 그때만 해도 교육도시라고 자랑하는 청주에는 제법이나 많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또한 제법이나 많았다. 징병검사를 마치고서야 속리산을 다녀오는 것 또한 그때가 처음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청주가 교육도시라는 것이었다.

나는 성년이 되면서부터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맴돌았다. 고향에서 살고 싶었지만 아무런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은 물론 대구와 부산으로 바람처럼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울산이었다.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면서 15년이나 살다가 청주로 올라온 것은 직장 때문이었다. 1992년 가을에 올라왔으니 어느 사이에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는 세월이 흘렀다. 앞으로 또한 별다른 이변이 없으면 청주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청주가 제3의 고향이기도 하다.

청주는 충절의 고장에서 교육도시로 성장했다. 어디서든 교육도시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청주라고 대답하던 고장이다. 그런데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부터는 가로수길이 아름답다는 도시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속도로 인터체인지에서부터 가경천의 죽천교까지 아름다운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늘어섰기 때문이다. 4차선 도로에 터널의 모형으로 늘어선 플라타너스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청주를 다녀간 사람들이 극찬하는 것이 가로수길이었다.

교육도시에서 산업도시로 발전하는 청주시민이 어느 사이에 66만 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동일 생활권으로 근접지역의 청원군민이 또한 15만이 가까워진다고 한다. 아름다운 도시로 발전하는 청주에는 관광자원과 문화유산이 또한 많기도 하다. 거기에 가장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직지였다. 하지만 나는 빠듯한 직장생활에 쫓기다 보니 별다른 관심이 없기도 했다. 청주 흥덕사의 직지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조차 주위사람들에게서 주워들어서야 알아차렸던 것이다.

지난 주말에 서울을 가겠다고 주저앉는 고속버스가 죽천교를 지나면서였다. 옆자리에 주저앉아서 가로수를 머쓱하게 쳐다보던 아주머니가 청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라고 말했다. 괜스레 으쓱해지는 나는 아름다운 도시로 발전하는 청주는 누구라도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청주가 자랑하는 직지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서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어물거리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청주에 살면서도 직지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르게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을 다녀와서야 직지가 궁금해지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컴퓨터책상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하고서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는 독일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구텐베르크 성서보다도 78년이나 앞서서 간행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난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유산이라는 것 또한 이제야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기록되는 직지의 일부가 프랑스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다.

인류역사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흥덕사의 직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될 정도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우리가 무엇보다 소중하게 보관하고 후손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하게 물려주어야 하는 문화유산을 프랑스 박물관에 보존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강제로 뺏어오지도 못하는 직지를 되돌려 받는 것은 프랑스 국민을 설득하는 일이다. 프랑스에서도 우리의 문화유산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또한 천만다행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쯤이나 되돌려 줄는지 모르는 직지가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