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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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수 기자
  • 승인 2006.06.1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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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으로 나라를 위해 귀중한 생명을 받쳐 조국을 수호한 호국 영령들의 충성을 기리고자 국가에서는 6월을 보훈의 달로 지정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갈수록 당시의 고귀하게 숨져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것 같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지만, 희생자들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민주적인 질서가 깊이 뿌리내려 좋은 열매가 맺히도록 우리 온 국민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라 없는 백성은 자신을 잃어버린 백성이다.

6·25 제 56주년을 맞으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피를 흘렸던 수많은 용사들을 생각하며 경의를 표하여야 할 것이다.

역사를 잊은 국민은 미래를 꾸려 나갈 수 없다.

미래는 과거에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미국 국회 개회기도회 때에 지혜로운 솔로몬이 남긴 말이 읽혔다고 하는데, 그것은 “지난날의 쓰라림을 회상한다는 것이 달갑지는 않으나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다.

조국을 위해 순교한자가 비록 죽었지만 오히려 말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무언(無言)의 말로 삶보다는 죽음을 통해 더 힘 있는 말이라고 했다.

한때, 필리핀의 위기를 구했던 것은 그 나라의 수녀들의 눈물이었다고 한다.

반정부 군중들을 진압하기 위해 마르코스 대통령은 2개 대대의 병력과 10여대의 탱크로 군중들을 포위하고 해산하라고 위협을 가하였다.

만일, 이때에 해산하지 않는 군중들에게 발포하도록 하였다면, 아마 수많은 희생자를 냈을 뿐 아니라, 민주혁명은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참으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군중들 속에 끼어있던 20여명의 수녀들이 앞으로 뛰어나와 양팔을 벌리고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울면서 군인들에게 호소하기를 “당신들은 누구를 위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가. 정의와 자유를 되찾으려는 우리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당신은 정의의 편인가, 아니면 마르코스의 사병들인가?” 하고 되물으며 병사들의 총부리를 막아설 때에 군인들은 그만 아무말도 못하고 그냥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무수한 전란 속에서의 시달림을 받고 살면서 국제적인 대규모의 6·25라고 하는 큰 전쟁을 겪은 나라이다.

1950년 6월 25일의 돌연 북한의 남침으로 우리나라 정부가 부산까지 후퇴하였을 때에, 당시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부산에 내려와 계시면서 초량에서 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우리 모두가 나라를 위해 3일 동안 금식하고 나라를 위해 울며 간절하게 기도하자고 했을 때에,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나라를 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지구상에 사는 인류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평화일 것이다.

그 만큼 전쟁이란 지긋지긋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전쟁이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류전 사사전 종교전 영토분쟁전 등이기 때문이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한 몸에 머리가 둘 달린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면, 이럴 때에 이 아이는 두 사람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쪽에 있는 머리를 떼어 보려고 하면, 다른 한쪽에 있는 머리가 아파할 때엔 한사람인 것이고, 아파하지 않을 때엔 그것은 두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한쪽 머리를 떼어도 아파하지 않을 때엔 이는 다 죽어있는 것이고, 아파한다면 둘 다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 이와 같이 한 몸으로서 삶과 죽음이 피차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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