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바쁘다, 도둑은 스스로 잡자
경찰은 바쁘다, 도둑은 스스로 잡자
  • 조한필 부국장<천안·아산>
  • 승인 2011.09.2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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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천안 신방동 한 주택에 사는 S씨는 아침에 눈을 뜨면 동네 잠복에 나선다. 차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모자를 쓰고 폐지 손수레를 끄는 한 남자의 흐릿한 사진이 한 손에 들려 있다. 지난달 23일 집 앞에서 자신의 카메라 가방을 들고 간 용의자다. 그 가방에는 주민등록증과 신용카드가 든 지갑도 들어 있었다.

S씨가 이렇게 직접 나서게 된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결코 가방을 찾을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경찰에 신고는 했지만 경찰 수사를 믿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아침 잠복’은 분실 당시 함께 있던 지인과 번갈아 하고 있다. 추석 명절 며칠 전부터 시작했지만 아직 사진 속 남자의 행방은 묘연하다. 경찰과 S씨가 찾는 걸 알고 ‘잠수’한 것이다. 경찰만 믿고 그동안 넋 놓고 있던 게 후회스럽다.

카메라 가방을 잃어버린 건 한 달 전 일이다. 차고 옆에 두고 승용차를 빼다가 다른 차와 충돌사고가 나, 정신없는 사이 ‘그 남자’가 들고 갔다. 집 부근 꽃집에서 설치한 CCTV에서 그 남자가 지나간 후 사라진 것이 확인됐다. CCTV에 찍힌 모습은 실루엣 수준이었지만 S씨와 꽃집 주인은 그 남자가 누군지 알 만했다. 이 동네에서 폐지를 수집하는 몇 명 중 젊은 축에 드는 사람이었다.

S씨는 경찰을 생각하면 고맙기도 하지만 화가 난다.

1. 화요일 오후, 그는 분실 당일 경찰에 신고했다. 관할인 천안일봉파출소에서 경찰관이 나와 조사를 했다. 꽃집 CCTV에 찍힌 ‘증거’ 수사를 신신당부했다. 카메라와 지갑도 중요하지만 카메라 메모리에 든 사진자료가 무엇보다 귀중했다. 곧 펴낼 책에 실을 사진이다.

S씨는 뜬눈으로 하룻밤을 지내고 파출소에 전화했다. 조사한 경찰관을 찾았다. 오후 늦게 출근한다고 했다. 대신 전화 받은 이에게 “꼭 꽃집 CCTV를 확인해 달라”고 전했지만 건성으로 듣는다는 느낌이다. 지구대에서 다시 파출소 체제로 바뀌면서 업무가 크게 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2. 목요일 오전, 파출소에서 조서가 작성돼 관할 천안동남경찰서 형사과로 넘겨졌다. 현행범이 아니면 경찰서에 넘기게 돼 있다. 강력1팀에 배당됐다. 단순 도난 사건을 왜 강력팀에서 맡나 궁금증이 들었다.

토요일 아침, S씨는 집 앞에서 그 남자를 발견했다. 경찰서에 연락했다. 토요일은 휴일이다. “월요일부터 본격 수사할 테니 기다리라.” 경찰이 저렇게 얘기하는데 곧 가방을 찾겠지. 오산이었다. 수사는 춤을 추고 있었다.

놀랍게도 수사관은 경찰 CCTV에 찍힌 흐릿한 사진을 들고 주변 고물상만 찾아 다녔다. 그 덕(?)에 고물상들에 소문이 퍼져, 범인은 종적을 감췄다. 초동수사가 중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먼저 S씨나 동네 사람들에게 그 사진을 보여줬더라면…. 가까운 데 길을 두고 돌아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아무 연락도 안 와, 경찰서에 전화했다. “강력사건도 많은데 매일 도난사건 용의자나 잡으러 다녀야겠느냐. 사건에도 경중(輕重)이 있는 것 아니냐”는 핀잔 섞인 소리를 들었다.

이 통화가 S씨를 거리에 나서게 했다. 한 70대 폐지수집인은 흐릿한 사진 속 그 남자를 알아봤다. “요즘 이곳에 오지 않는다”고 했다. 내일부턴 고물상을 돌며 잠복하려 한다. 폐지 팔러 고물상엔 오겠지.

최근 경찰관 근무평가 때 검거 실적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강도·살인·폭행범 등의 체포가 우선임은 어쩔 수 없다. 이젠 도둑은 스스로 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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