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에 담은 세월
항아리에 담은 세월
  • 이진순 <수필가>
  • 승인 2011.09.1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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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숲 속이 되어버린 나의 집. 뒷동산을 향해 서서 목청을 가다듬는다. 설거지나 청소를 하다 또는 마당을 쓸면서 가끔 하는 짓이다. 토첼리의 세레나데, 먼 산타루치아. 달밤, 즐거운 나의 집을 부르다 보면 행복함을 느낀다.

허름한 한옥이지만 편히 쉴 수 있으니 더 없이 만족하다. 샘에서 맑은 물이 나도록 빨아온 걸레로 문갑 위에 항아리를 닦는다. 볼수록 정이 간다. 이 항아리를 빚기 위하여 드린 정성이 떠올라서다. 지점토를 배우고 두 번째 작품이다.

글 쓰는 일은 쓰고 지우고 또 쓰고 몇 번이고 다듬어서 활자화되고 나면 번번히 숨고 싶어진다. 지점토 작품으로 집 안 곳곳에 꽃꽂이를 해 놓았다. 이곳저곳에 놓고 봐도 부끄럽지 않아서 좋다. 다만 내가 만든 것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타원형의 큰 항아리는 만추를 한눈에 느낄 만큼 가을 냄새가 물씬 난다.

항아리를 빚으며 학창시절의 추억을 더듬었다. 성탄이 가까워 오면 우리들은 위문편지를 썼다. 파월 장병, 국군 장병, 일선장병 아저씨란 제목을 붙이고 숙제를 해야 했다. 그때 한 친구가 새 농민 책을 들고 왔다. 펜팔난에 군인 아저씨 주소를 찾아 편지를 띄웠다. 의미 없이 국군 아저씨께는 무척 많이 써 보았기 때문이다.

얼마 후 답장이 날아 왔다. 우리 반은 답장이 오면 게시판 뒤에 붙여서 모두 읽었다. 그중에 내게 보내온 글은 멋진 글씨에 문장력이 훌륭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닐 때에도 편지는 끊이지 않고 계속 왔다. 시시콜콜한 가족이야기나 신상에 관한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그는 문학을 하는 이였던지 많은 독서 감상을 들려주었다. 솔베지의 겨울 나그네를 즐겨 듣는 아저씨라는 것,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닮았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훈련을 받고 온 날의 고생담, 강원도 산골 냄새가 가득 담긴 문장력은 매력적이었다. 지금도 가끔 허허한 들판의 옥수수 대궁이 슬픈 가락을 토해 내고 있다는 표현과 불붙는 산골 이야기는 그림을 보는 듯 감미롭다. 갈색 단풍잎에 시를 적어 보내 왔던 사연을 차곡차곡 가슴에 쟁여 놓았다.

오후가 되면 교문을 향하여 우체부가 오기를 기다렸다. 어떤 날은 샘터 책이 오기도 하고 하얀 눈이 내리던 날 알밤이 가득 든 소포 뭉치가 터져 동료 직원들로부터 놀림을 받았던 일을 되돌아보니 지금도 얼굴이 붉어진다.

예고 없이 군인 아저씨가 시골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새까만 얼굴에 키 작은 병장 아저씨는 글 속에 그가 아니었다.

지금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성격으로 인해 손해 본 일들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무를 자르듯 그렇게 절교를 선언할 게 뭐였던지 글벗으로 지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그 후 난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한 발은 족히 될 두루마리 글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어머니 없이 고모 손에 자랐다는 사연과 냉혈한이 되어 제대를 하고 나면 기자가 될 것이라는 포부와 부산이 고향이라는 내용의 편지가 타이프로 쳐 보내 왔다.

지점토로 항아리를 빚으며 한 편의 드라마처럼 지난 일들이 스쳐간다. 세로로 곱게 써 내려간 한지에 꽃잎을 수놓았던 일이며, 가랑잎에 시 한 편을 적어 보냈던 일들이 이십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감을 칠하고 락카를 바르며 항아리 속에 혼을 불어넣었다.

창밖에는 비가 내린다. 솔베이지의 겨울 나그네를 듣는다. 항아리는 내게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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