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권
행운권
  • 강희진 <수필가>
  • 승인 2011.09.13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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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보름 간격으로 우리 지역에서 조그마한 축제가 두 번 열렸다. 그 때마다 나는 찬조 경품을 냈는데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첨자가 경품을 받아보고 웃을 수 있을 만한 상품을 고르느라 나름대로 고민했다.

그날도 행운권을 나누어 주자 회원 모두 이제까지 경품 당첨 경험이 별로 없는 듯 이번에도 되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도 은근히 기대를 하는 눈치였다. 나 또한 10여 년 전 음성예총에서 실시한 야유회에서 마른고추 한 포대가 당첨이 된 후 아직까지 당첨되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내 행운권의 번호가 불러졌다. 그 희열이란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혹시나 놓칠세라 전속력으로 뛰어가 310번이라 외쳤다. 자리에 와서 풀어 보니 커피포트였다. 이미 집에 있는 물건이었지만 보고 또 보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참으로 민망한 일이었다. 그래 체면도 없이 뛰어가 좋아라 날뛰었나 싶은 게.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곁에서 지켜 본 회원이 전화를 했다. "참 인간적이었습니다. 점잖은 분이 그리 큰소리로 외치며 좋아라 하시다니요. 뭐가 들어 있던가요?"

나는 행사를 시작하기 전에 즐비하게 쌓여 있는 경품을 보고 이번엔 반드시 타가리라 다짐하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일찍 돌아가는 회원들의 행운권을 모두 받아 부채꼴로 펴고 앉아 번호 하나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렇게까지 간절히 원하는데 이번에도 당첨이 안 되면 앞으로 계속 행운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감까지 밀려왔다. 그랬는데도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 번호가 불리지 않았다. 풀이 죽어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마지막 경품 추첨을 한다는 것이다.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경품을 보며 이미 체념한 상태였지만 또 다시 기대하며 되돌아왔다. 그런데 꿈결처럼 들리는 310번! 이번엔 실망시키지 않고 번호가 불러진 것이다.

그리스 신화 행운의 여신 티케 생각이 났다. 그녀는 뒷머리가 없고 앞머리만 있다고 한다. 앞머리만 있는 이유는 행운이 왔을 때 재빨리 붙잡으라는 의미고, 뒷머리가 없는 것은 기회가 지나갔을 때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오늘밤 나는 티케의 앞머리를 붙잡은 것이다. 어쩌면 티케는 늘 내 앞에 앞머리를 드리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박만을 바라며 티케에게서 고개를 돌려 그녀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는 행운은 멀리 있다, 붙잡기 어려운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작은 커피포트 하나가 오늘밤 내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게 한다.

사실 행운은 쉽게 오지 않기 때문에 행운이다. 행운이 만약 밥 먹듯이 쉽게 찾아오는 거라면 그것은 이미 행운이 아닌 권태로움이다. 티케라는 여신의 이야기가 곧 티켓의 어원이 된 것도 잡힐 듯 잡힐 듯 아슬아슬한 여운이라서 행운권으로 지칭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레던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내게 또 다른 생각이 스쳐갔다. 행운이란 또 우리 곁을 수시로 지나친다는 걸 몰랐다. 살림에 필요한 전기용품 같은 게 행운의 전부는 아니다. 그보다 더 큰 행운은 가족 모두 건강하고 무탈하게 지낼 수 있는 거였다. 다만 보이지 않는 거라 행운이 찾아온 걸 모른 채 자그마한 커피포트가 당첨된 것만 장하게 여겼다. 커피포트가 대단치 않다는 게 아니라 더 큰 행운에 당첨된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산 아이러니를 보는 것 같다.

그래도 경품에 당첨된 것은 오랜 시간 들떠 있을 정도로 기쁜 일이었다. 당첨된 게 뭐냐고 지인들이 물을 때마다 싫증 내지 않고 시원시원 대답을 했다.

"네, 내가 받은 것은 행운이 가득 들어 있는 커피포트였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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