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보리밥이 싫다
나는 아직도 보리밥이 싫다
  • 이규정 <소설가>
  • 승인 2011.08.30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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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보리는 예전부터 쌀 다음으로 칭송 받는 오곡이다. 보릿고개를 넘기던 시절에는 보리밥을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사람들이 제법이나 많았다. 나또한 초등학교 시절에는 보리밥이라도 마음 놓고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윤택해지는 살림으로 먹는 걱정은 사라졌다. 하얀 쌀밥이 주저앉는 식탁에서 보리밥을 찾는 사람이 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소화는 또 얼마나 잘 되는지 걸핏하면 방귀가 튀어나오는 보리밥을 무엇 때문에 먹겠는가. 자연스레 멀어지는 보리밥에 또한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이 보리밭이었다.

보리는 늦가을에 씨를 뿌려서 다음 해 봄에 수확하는 곡식이다. 이른 봄에 봄소식을 전해주며 파릇하게 솟아오르는 보리가 정겹게도 했다. 아지랑이와 함께 무럭무럭 자라는 보리가 또한 얼마나 탐스러웠는지 모른다. 가끔은 학교를 가다가 뺑소니를 치겠다고 숨어드는 보리밭에서 도시락을 먹기도 했다. 파릇한 모습으로 자라는 보리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슬그머니 누워버리는 보리밭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어디에서나 흔하게 보았던 보리밭에 애틋한 추억이 남아 있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보리가 자라서는 초등학생의 키를 훌쩍 넘는다. 이삭이 피면서도 속살처럼 보드라운 보리가 탐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차츰 누렇게 익어가면서 거칠어지는 보리이삭의 가시가 여간 따가운 것이 아니었다. 이삭이 영글어가면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것이 또한 보리이다. 이삭을 보호하려는 본능인지 칼날처럼 거칠어지는 잎사귀들이 또한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보리를 베러 들어서기도 전에 달라붙는 보리의 가시들이 얼마나 따가웠는지 생각만 해도 근질거리는 몸뚱이에 서늘해지는 소름이 돋는다.

보리를 베는 것도 그렇지만 보리타작에는 보리이삭의 가시와 칼날처럼 날카로운 잎사귀들이 온몸에 달라붙었다. 그때만 해도 보릿단을 어깨에 둘러메고 넙죽한 돌에 후려치는 것이 보리타작이었기 때문이다. 덥기는 또 얼마나 더웠는지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몸뚱이에 달라붙어서 쉽사리 떨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보리타작이 끝나는 저녁에서야 쫓아가는 개울물에서 목욕을 하였다. 하지만 얼마나 따가웠는지 목욕을 하고서도 근질거리는 몸뚱이에 적잖은 핏물이 맺혀 있었다.

경운기와 함께 보리를 탈곡하는 기계가 보급되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반자동이다. 사람이 잡아드는 보릿단을 탈곡기에 잡아넣는 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경운기를 따라다니며 잡아드는 보릿단하고 씨름을 하였다. 얼마나 따가웠는지 찔끔거리는 눈물이 이마에 맺히는 식은땀하고 사이좋게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찮은 불평불만조차 못하는 것은 보리밥이라도 먹어야 살아남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하는 사람이 흔하지 않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전처럼 굶어 죽는 사람은 없다. 쌀밥이나 일반 잡곡밥보다 거칠게 느껴지는 보리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당뇨에 좋은 보리밥이 다이어트 식품이라고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보리밥이 싫다고 타박하는 것은 여전하다. 보리밥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애틋하게 느껴지는 추억과 함께 보리타작으로 고생하던 순간이 스쳐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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