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에서 깨달음을 얻다
강가에서 깨달음을 얻다
  • 정상옥 <수필가>
  • 승인 2011.08.2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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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지루한 장마가 떠난 자리는 참혹하다. 아무렇게나 베어 물다 던져진 사과처럼 강둑이 여기저기 움푹 잘려있고 물 빠진 천변(川邊)은 온갖 쓰레기더미가 널브러져 있다.

비를 은근히 좋아하는 나지만 올여름에는 누구에게도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기가 민망했다. 전국에서 비로 인한 피해가 너무도 엄청나게 크다는 소식이 여기저기 들리면서 괜스레 비를 좋아하는 내가 죄인인 양 어깨가 움츠러들곤 했다.

며칠 동안 쏟아 붓듯이 내리던 비가 소강상태가 되던 날, 잠시 햇살이 비치는 틈을 타 강가에 섰다. 비는 그쳤지만 어느 산골짜기쯤에서부터 줄기가 모여 흘러왔는지 흙탕물줄기가 거센 물너울 되어 요동치며 무서운 기세로 흐르고 있었다.

천변의 귀퉁이 밭에는 장맛비에 쓸려나가고 남겨진 농작물들이 한낮의 푹푹 찌는 듯한 햇살에 볼썽사납게도 아무렇게나 축축 늘어져 쓰러져 있다. 무너진 밭둑에 노인 한 분이 걸터앉아 흐르는 물줄기를 망연히 바라본다. 땀과 때 국물이 범벅이 되어 후줄근하게 젖은 적삼을 굽은 등걸에 걸치고 앉아 있더니 내가 다가서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돌아보지도 않고 두 손을 땅에 짚고 간신히 일어나 발자국을 옮기며 중얼거린다.

“늙은이 시름이나 쓸어가지, 가져가지 말아야 할 것들은 왜 다 가져갔누...”

순간 고부랑한 노인의 등줄기에 젖은 땀만큼이나 인생의 서글픔이 진득진득 묻어나는 듯해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멀어져가는 그분의 터벅대는 발자국에 내 눈이 함께 한참동안을 따라갔다.

사람이 사는 곳곳마다 울고 웃는 절절한 사연이 왜 없을까마는 황혼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그분의 삶에 아직도 무슨 시름이 그리 많을까. 삶의 고단함이 흠뻑 젖은 그분이 던져놓은 자조적인 푸념 한마디가 천변을 거닐면서도 화두처럼 머릿속을 헤집는다.

장맛비에 불어난 강물이 노년의 고달픈 일상과 천고의 시름만을 싣고 휩쓸어 떠밀고 갔더라면 좋았으련만 땀과 정성으로 가꿔놓은 농작물들을 망가뜨리고 그 자리에 지저분한 쓰레기더미만 남겨놓고 갔으니…….

살면서 온전한 내 것이 아님에도 내 것인 양 쉽게 놓지 못하고 집착하다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 앞에서 홀연히 떠나보내야 했던 허탈한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젊음도, 사랑도, 추억도, 열정마저도…….

만고풍상을 겪으며 세월의 흐름에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하고 오욕칠정의 갈급함이 남겨 놓은 건 후회와 어리석음으로 얼룩진 지난날의 부끄러운 흔적들뿐이었지.

세상살이에서 오는 시름과 삶의 무게에 어깨가 짓눌릴 때면 웬일인지 소견은 더 좁아지고 괜한 원망과 아집은 흙탕물처럼 요동치어 판단력을 흐려놓곤 했었다.

노자는 사람들에게 삶에 지칠수록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흐르는 물처럼 살라”며 물의 진리를 배우라고 하였다 한다. 처해진 상황에서도 본연의 마음을 잃지 말고 흐르는 물처럼 순응하며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살라는 교훈이었으리라. 물은 낮은 데로 흐르지만 흐르고 흘러간 긴 여정의 막바지는 언제고 마침내 드넓은 바다였으니까.

속이 빈 헛된 욕망은 강물 같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흘려보내고 진실과 묵묵함으로 성실한 삶을 영위하리라. 비가 그친 후 점점 평정심을 찾아가는 강물줄기처럼 어느 것도 영원이란 존재할 수 없음을 알기에 현재의 안온함을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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